bgm 그 중에 그대를 만나 by 이선희






그 중에 그대를 만나.

w.BAAAAM






단언컨대,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장백기는 살아 생전 그토록 열렬한 적 없었다. 그토록 초조해 본 적 또한 없었다. 대학교 합격 발표가 나던 날도 그토록 떨리지 않았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순간은 들어간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는 자신의 첫 직장, 그것도 바람이 휑히 불던 겨울. 옥상에서 이루어졌다. 예상한 적 없던 전개에는 으레 실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물음표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와중에도 횡설수설 단어를 내뱉고 있는 입술이 원망스러웠다. 점점 꼬이는 혀가 추운 날씨에 바짝 얼어버린 탓이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면서도 마른 혀가 멈추지 못하는 것은 이미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에 백기는 연신 이마를 훔쳤다. 얼마나 우스워보였을까. 또,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가뜩이나 사수의 눈 밖에 난 제 처지가 가여워서라도 적당한 선에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레버 채로 뽑힌 감정에 브레이크가 들 리 없었다. 백기는 망연자실했다. 반대로, 상황이 그쯤 되니 이판사판이었다. 차라리 나를 경멸해 주세요. 아주 혐오하시라고요. 그런 생각들을 한 것도 같다.



얘기는 다 끝난 겁니까?



무정한 사수의 답변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삭막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다정하지 않을 것은 예상했지만 모질지도 않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정갈한 입술 사이로 혐오의 말이 쏟아져 나올 것을 각오했다. 단정한 눈빛이 저를 경멸하리란 조바심에 미리 겁을 먹었다. 하지 마세요. 말하고 싶으면서도. 차라리 그렇게라도, 이 모질도록 끊어지지 않는 귀머거리 같은 감정이 대차게 버려지길 바랐다. 스스로는 끊을 수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대신 가위를 건넸다. 다시 붙일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해 달라고. 잔인한 짓을 그에게 미뤘다. 그리고.


많이, 고민했겠군요.


내내 자신과 그의 구두 앞 코만 살피던 꺼진 시선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껏 그의 사수로부터 들었던 말들 중에 가장 다정한 말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대답이 어찌되든 좋았다. 그가 그저 적당히 착한 사람인 척 구는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백기의 눈에 눈물이 흠씬 고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게서, 대답을 듣고 싶은 겁니까?


나는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다정한 말이 듣고 싶었던 거지. 괜찮다는 말을 욕심냈다. 그보다는 안아주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실은….


백기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좋아해요’가 전부였다. 오랫동안 꾹꾹 누르고 있던 감정이 실토와 동시에 바닥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내팽개 치듯 제 감정 보따리를 풀어놓은 뒤 그에게 한 번 살펴라도 봐 달라고 구걸했다. 그것을 구차하다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절박했다. 그 절박함이 ‘좋아해요’ 라는 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어느 샌가 뚝뚝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백기의 하얀 이마가 그의 가슴팍에 기댔다. 눈물은 투명해 그의 푸른 셔츠 위에 어떤 자국도 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다만 젖었다. 젖었을 것이다.







“대리님. 언제 오세요?”


퇴근 후 씻고, 침대에 앉아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다. 보통 때라면 노트북을 키거나,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일 따위로 보내겠지만 요즘은 내내 그에게 전화를 거는 것으로 하루의 마무리를 지었다. 해준은 장기 출장 중이었다.


“예상보다 많이 늦어지시네요……. 네, 괜찮아요. 밥은 먹었어요. 대리님은요?”


핸드폰은 말 그대로 연락 수단으로 그쳤다. 그가 핸드폰을 쥐고 노닥거리는 모습은 지금껏 본 적도 없었거니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메시지를 보낼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퇴근 후, 전화 한 통을 거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수는 물론, 백기도 그리 수다스러운 성격이 되질 못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생각한 할 말들을 두런두런 읊조리는 일이 크게 어렵진 않았다. 요즘엔 보통 오늘 뭘 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고, 또 밥은 뭘 먹었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일들을 전하는 것으로 대화를 메우곤 했다.


“저는 오늘 제육볶음 먹었는데 별로였어요. 그 회사 근처에 아시죠? 이모네요. 옛날이랑 맛이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오랜만에 석율씨랑 영이씨랑 같이 먹었는데 똑같은 소리 하더라구요. 장 그래씨는…영업 3팀이 요즘 일이 많아서 못 내려왔어요. 그래서…….”


석율씨가 서브웨이에 들려서 뭐라도 먹여야 한다고 부랴부랴 싸들고 올라갔어요. 진짜 지극정성이에요. … 백기는 작게 웃었다. 우리 짱그래 가뜩이나 말랐는데 거기서 더 마르면 안 돼. 그럼 누가 챙겨. 백기씨가? 영이씨가? 아니지. 바로 나, 의리의 사나이 한 석율이란 말이지. 되도 않는 석율의 흉내를 내면서 백기가 또 한 차례 키득거렸다. 해준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웃고 있으리라. 해준은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일이 드물었다.


“대리님은 잘 좀 챙겨 드시고 계신 거 맞아요? 바쁘면 식사도 잘 안 하시잖아요. 대리님들도 옆에 없는데 잘 챙기셔야죠.”


저도 조금 말랐다고 하는데……. 다 대리님이 곁에 없어서 그런 거예요. 괜한 투정으로 마무리 하며 백기는 푸스스 웃었다. 이런 투정이 그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러우면서도, 또 한 편으론 이 정도 투정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백기는 핸드폰을 고쳐 쥐고는 아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겨울 내내 켜놓는 전기장판 덕에 침대 속은 아늑했다. 덕분에 요즘엔 통화를 하다가 까무룩 잠들어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일은 괜찮아요. 힘든 것도 없고요. 잔소리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핸드폰이 아니라 일반 전화기였더라면 전화기 선을 배배 꼬고 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백기는 좀 더 깊숙이 베개에 고개를 묻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색색거리는 숨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씩, 침묵이 주는 공백이 버거울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욱,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다. 백기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엄한 사람의 시간을 뺏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 들었던 걱정은 속삭이듯 읊조린 한 마디와 함께 흔적도없이 녹았다.



“……보고 싶어요. 형.”



많이요. 아주…많이.

전화는 곧 소리 없이 끊겼다.







……사실 고민이 됩니다.


망설임 끝에 나온 대답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다. 머뭇거리고 있음이 확실해 진 순간, 백기는 문득 현실을 깨달았다. 내가 이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구나. 제 감정의 크기를 들이대기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을 상대방의 처지가 그제야 떠올랐다. 깊이 또한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잘은 몰라도 빠져 죽기엔 딱 좋을 감정이었다. 언제 이렇게 깊고 넓어졌는지, 스스로도 알 길이 없을 만큼.


아니요. 아닙니다. 백기는 황급히 그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방금 했던 말은…잊어주세요. 독한 말을 어금니 사이로 깨물며 섣부르게 거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모진 사람으로 만들 순 없었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잔인해 달라 부탁하는 일이야말로 잔인했다. 백기는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섰다. 그만큼의 거리를 만들어놓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의외로 거리를 좁힌 것은 해준이었다. 가만히 백기를 바라보고만 있던 해준은 곧 다짐하듯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멀어진 거리를 다시 메우는 야속한 사수의 속마음 따위 살필 겨를이 없었다. 백기는 아주 돌아설 준비를 했다. 제가 못 이겨 고백한 감정으로부터 제가 먼저 도망칠 준비를 했다. 이런 건 처음이라서, 제가 잘 몰라서. 그래서, 그래요. 기본 양식이 뭔지,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하는 방법을 아직 몰라서. 온갖 변명들이 앞다투어 쏟아졌다. 그러니까 이것 좀…놔 줘요.


해준은 백기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왜, 도망치는 겁니까?







도망치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으니까요.


백기는 거울 속의 남자가 양치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밤새 뒤척거렸는지 머리가 엉망이었다. 부스스한 눈을 한 채 억지로 물고 있는 치약이 다소 역겨웠다. 퉤. 양칫물을 뱉고는 입을 헹궜다. 또, 시작이다. 하루의 시작은 너무나 사소하고, 당연하게 찾아왔다. 그날의 날씨가 맑음인지 흐림인지. 혹은 폭우인지.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하루는 시작 되고, 출근은 해야 했다.


로비에서 성준과 마주쳤다. 같은 층에 있지만 가끔 오가며 인사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 되어버렸다. 안녕하세요. 으레 하는 인사에는, 어어. 장백기. 으레 하는 평범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오늘 오는 날이지?”

“아……. 네.”

“그래. 잘해 봐.”


같은 층에서 나란히 내린 두 남자의 발걸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백기는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자리에 도착했다. 비어있어야 할 옆자리에는 수트 쟈켓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오늘 오신다더니 잠깐 화장실에라도 가신 모양이다. 백기는 자리에 앉아 마른 얼굴을 더듬었다.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 같은 건조한 손바닥이 뜨거운 입김으로 금세 축축해졌다. 그래서, 백기는 그만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장 백기씨?”

“아, 아. 네!”


울 수 없다. 울어서는 안…된다. 생각한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기가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굽어지고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사회생활이 그에게 남긴 습관이었다. 가만히 백기를 바라보기만 하던 그는 곧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했다. ‘잘 부탁해요.’



“네, 저도 잘…부탁, 드립니다.”







그럼 대리님은 왜 저를 붙잡으신 겁니까?


따지듯 물었다. 화를 낼만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물씬 물려드는 감정을, 그 순간에게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알아서 꺼져주겠다는데, 부러 잡는 의도가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래. 나한테.


방귀 뀐 놈이 성 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우스워지기 전에 멈출 수 있는 건 멈춰야 했다. 인정하자. 스스로가 너무나 미숙했음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몸싸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백기의 숨은 이미 끓어 넘쳤다. 그럼에도 차마 붙잡힌 손목을 흔들 자신은 없었다. 그 손을 떼어낼 엄두는, 더더욱. 백기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이미 실컷 울었던 눈시울이 무색하도록.


도망가니까요. 장 백기씨가…도망가니까.


생각해보면 제 사수가 하는 말이라기엔 퍽 미숙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도망쳐서? 도망치니까 쫓아왔다고? 백기는 문득 영영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러고 나면 혹시라도 그가 쫓아와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도망가지 말아요.



아직은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에 둘은 동의했다. 백기는 잡혔던 손목을 추욱 늘어뜨리곤 잔뜩 혼이라도 난 어린아이처럼 말을 뭉갰다. 음절과 어절이 서로 이어지지 못하고 자주 늘어졌다. 그러니까요. 대리님. 차라리요. 그냥 때리시거나…그래도, 되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하려는 말은요……. 알아듣기 어려운 말 투성이었다. 그러나 해준은 기다렸다. 기다려주었다고, 믿는다.



처음입니다.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비로소 그는 말했다. 백기는 아직도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랑 연애하는 건, 처음입니다.







피곤한 하루였다. 아무도, 아무 일도 그를 괴롭히지 않았음에도 백기는 하루 종일 시간에 시달렸다.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이, 그리하여 살아있다는 것이. 그것만으로도 피곤한 하루가 있다면 바로 오늘이다. 백기는 씻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은 먼저 울리는 일이 드물었다. 설사 간혹 그를 찾는 이가 있다한들, 그것이 해준이 아니라는 사실이.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들었다.


백기는 몸을 둥글게 말고는 심심하기만 한 핸드폰 화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갤러리로 들어가 조심스레 비밀번호를 풀었다. 폴더 안의 사진은 세 장뿐이었다. 해준과 함께 찍은 사진은 그 세 장이 전부였다. 사진 찍는 걸 원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사진 속의 해준은 하나같이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백기는 작게 웃었다.


보고 있으려니 더 보고 싶다. 백기는 잠시 머뭇거렸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보고 싶어요. 목구멍 아래서 메아리치는 감정의 대변은 단단한 한 마디로 능히 완성되었다. 보고 싶어요. 그것 말고는 할 말이 없어요. 좋아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모두 무색할 정도로 그 한 마디가 오직 절실했다.


신호음이 멈췄다. 백기는 한 번 침묵하는 새에 두 마디 말을 준비했다.


“형.”


‘둘만 있을 때에도 대리님이라고 부를 겁니까?’

‘저, 하지만…. 그, 익숙하지 않잖습니까. 호칭이란 게 그렇게 갑자기….’

‘형이라고 불러.’



“나…죽을 것 같아.”



‘…백기야.’



수화기 너머에선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백기는 숨을 참듯 눈물을 삼켰다. 메마른 심정은 더 이상 외로움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만큼, 외로웠다. 외로움은 무통(無痛)이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아프다. 너무나, 아프다. 백기는 몸을 더욱 둥글게 말고는 두 손으로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잡아도 잡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잡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오늘…. 새로운, 대리님이…왔어. 더…는 자리를 비워, 둘 수…없어서…. 좋은, 어, 좋은 사람인 것…같아요…. 나한테, 잘, 부탁한, 다고…. 어깨를, 두 번…두드려…줬는데….”



당신과도 그런 첫 만남을 꿈꿨었지. 기대에 부푼 신입에겐 너무나 모진 대우라 금세 접었던 바람이었지만. 그냥 그렇게 다 접었으면 좋았을 걸. 나는 왜 당신이 좋았던 걸까. 백기는 눈물을 먹었다. 가득 찬 목구멍이 소리를 내기 어려워 웅웅거렸다. 자각하지도 못한 새에 이미 울고 있었다. 차라리 토해내듯 울고 나면 시원해질까. 아니, 아니다. 이미 그렇게는 너무 많이 울었다. 백기는 삼일 동안 지난 이십 육년의 시절을 모두 다 합쳐도 모자랄, 앞으로 삼십 년 후까지 흘릴 눈물을 모조리 토해냈다. 미친 사람처럼 울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찢어지는 가슴이 다 뭉개지도록, 울었다. 그의 사수가 결코 원하지 않았을 방법으로.




젖었다. 입은 셔츠가 다 눈물에 젖도록 두었다.

눈물은 투명해, 그저 젖는 것이 고작이니까.




“…밥은, 못, 먹…었는데, 자꾸, 말라간…다고, 하는, 데, 그래도…아무도, 나한테, 말, 크, 윽, 을, 못해…요. 다, 알잖아…. 다, 흐, 윽, 아니까….”



석율이 와서 그를 말렸고, 성준도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미 잠들었다. 그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리라.



“아무, 일도, 없는…데, 아무, 일, 도……없는데….”



당신도 없어. 당신이 없어. 당신이……형이, 없어서.



“……보고, 싶어서…죽을 것, 같, …아.”





교통 사고였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곧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백기는 그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왠지 혼자 들어가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분명 한 소리 하겠지. 날이 이렇게 추운데 왜 밖에 있느냐고. 벌개 진 코끝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표정을 지었겠지. 미간을 잔뜩 좁히고선, 어린애를 혼내 듯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어쩔 수 없다는 듯 안아줬겠지.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왠지 처음 연애하던 기분을 내고 싶기도 하고 말이지. 복도 끝에서 당신 모습이 보이면 내가 팔을 별려 줘야지, 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네요. 그렇게 말한 게 생각이 나서…. 남자랑 연애하는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도, 아이도 갖지 못하겠지만. 알고 시작했지만. 그래도, 평생 당신을 기다려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우리의 하루가 서로에게서 끝나는 것 정도는…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날, 해준은 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전화를 받지 않고,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서야. 뭔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떡하지. 뭘 하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다 결국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할 수 있는 게 기다리는 것밖엔 없으니까. 기다리고 있어야지.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이, 오겠지.




“…형, 형…. 해준…형, 강, 해준…….”



우리의 커밍아웃은 생각보다 조촐했다. 아들의 장례식에서 미친 듯이 울고 있는 남자가 평범한 부사수로만 그치지 않을 거란 사실을 모를 수 있는 부모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죽은 자의 사생활은 특별히 문제될 것 없었다. 살아있다 해도, 어차피 그들의 품에 손주를 안겨주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제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가능하지 않은 일 앞에선 모두들 침묵했다. 어떻게 해도 되지 않을 일이란 것이 있었다. 유일하게 다행인 점은 욕을 듣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여기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었다.


핸드폰 번호만이라도 살려두고 싶다고,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부탁이었다. 인정해달라고도, 어여삐 봐달라고도 말씀드리지 못했다. 불가능은 곧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 무가치하고 소모적인 일에 선뜻 동의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처음의 인정이 오래 가진 못했다. 백기는 스스로를 세뇌했다. 장기 출장을 간 거야. 그냥 조금, 떨어져있을 뿐이야. 매일 아침마다 시작되는 하루의 시작 앞에서, 바로 마주 할 빈 옆자리를 보아도 무너지지 않도록.










사실, 연애를 많이 해보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생각하기를, 당신도 미숙했던 것은 아닐까. 무엇이든 완벽하게 척척 해낼 것 같은 남자가 연애까지 잘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처음, 해준은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 답지 않은 변명들을 미리 늘어놓으며,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실수에 대비하는 모습만이 오직 그다웠다. 그러나 정작 백기에게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장 백기씨한테 잘 못 해줄 수도 있어요. 그래도….




끌어안았다. 그저 끌어, 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기적은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당신, 내게. 여전히.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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