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02







얼굴부터 생김새, 풍기는 분위기하며 은연중에 흩뿌리는 향기까지. 기억 속의 소년과 닮은 것은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마주친 순간, 그 견고하던 심정이 바닥부터 흔들렸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돌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면 그 누가 믿을까. 경염의 동공에 다시 빛이 돌아오기까지는 찰나였지만 동시에 영겁이었다.


…홀리지 마십시오. 린신의 언질은 괜한 경고가 아니었다. 경염은 마르지도 않은 목에 헛기침을 했다. 인사에 대한 답을 할 적시를 놓친 까닭이다.

“매장소라…했소? 헌데, 곤족이라니. 곤족은 분명….”
“예, 모두 몰살당했지요. 저를 비롯하여 살아남은 자들은 몇 없습니다. 저 또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이 시대에도 기괴한 미신을 믿는 풍습은 여즉 남아있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니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하룻밤 사이, 곤족이 모여 살던 마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 의해 낱낱이 붕괴되었다. 사람을 홀려 재앙으로 모는 저주 받은 종족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괴한들은 재물을 빼앗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남녀 가릴 것 없이 강간을 한 뒤 그 잔재를 불태웠다.


그럼에도 이 끔찍한 사건은 여느 신문, 혹은 방송에서도 한 줄을 다루는 법이 없었다. 경염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임수를 통해서였다. 그는 그 끔찍한 날에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하나로,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서, 당신은 나를 통해 무엇을 할 계획이오?”

궁금한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경염은 깊이 캐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아픈 과거사를 건드리는 것은 앞으로 그가 지닌 무게를 함께 나누어지는 것이라고. 기왕은 경염에게 그리 가르쳤다. 이 또한 임수를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에는 경염도, 임수도 열다섯에 불과했다.


어린 경염은 기왕의 타이름을 끝으로 다시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종 사건의 진모를 모조리 알고 싶었다. 그래야만 나눠질 수 있는 무게라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임수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산쥬는 삼합회의 사람입니다. 만남이 지속되다 보면 분명 꼬리가 밟힐 터. 앞으로는 제가 전하의 일을 도모할 것입니다.”
“내가 그대의 무엇을 믿고 말이오?”
“이 일은 신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본디 경염은 무뚝뚝하고 딱딱한 면이 없잖아 있으나 무례한 성정은 결코 아니었다. 세월에 깎이고 풍랑에 부딪치며, 와중에 사람을 잃고. 스스로 인정(人情)을 버렸을지언정 본래 다정한 사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매장소는 희미하게 웃었다. 벌써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강산도 제 모습을 바꾸기에 충분할 진데 사람이라고 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찰나, 가슴 한 켠이 따끔거리긴 했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매장소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로 경염을 응시했다. 방 안에 가득 찬 짙은 꽃 내음과 비교하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아스라한 미소였다.

“…미안하오. 지금 내가 조금 예민한 것 같으니.”
“어제 있었던 일의 전말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지금은 심중이 어지러우실 때입니다. 저는 괜찮으니 크게 마음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해해 준다니 고맙소. ……일단 오늘은 일어나 봐야겠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 합시다.”

주어진 시간은 서로를 알기엔 턱없이 짧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탓도 있었다. 코를 찌르는 곤족의 향기가 경염에게는 너무나 독했다. 생애 두 번째로 보는 곤족이었다. 그러나 임수는……. 청량한, 전혀 다른 향기를 품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꽃이 아니라 나무였다. 이제 막 돋아나는 싹. 그 위로 다 자란 잎사귀가 바람에 부대낄 때마다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생생한 내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바로, 그. 내음. 경염은 다시 매장소를 응시했다. 역시 다르다. 너무나도 다르다. 이제 그만 목마른 그리움에 헛것을 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다른 일들을 염두에 둘 여유는 없다. 즉위식까지 고작 십사 일 남짓. 경염은 스스로 잡념의 문을 닫았다. 명심하자. 그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눈앞의 상대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도와줄 동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린신은 그렇다 치고…,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소?”

그에 비해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신분을 확인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절차였다. 회상에 정신이 팔려 당연한 순서를 간과할 뻔 했다.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 서 있던 매장소는 뒤늦은 질문에 슬핏 웃고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저는, 랑야관(瑯琊官)의 주인입니다. 전하.”








랑야관. 그 이름이라면 들어본 적 있었다. 요즘 시대에는 찾아보기 드문 요정(料亭)으로 일반인들은 출입 자체가 불가능하고, 허락받은 이들만 드나든다는 곳이었다. 정재계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그 외에는 연예인들만 간혹 얼굴을 비춘다는 곳. 소문으로만 들었지 경염은 한 번도 발걸음 한 적 없던 곳이었다. 랑야관에서는 온갖 모략이 판을 친다던 소문 때문이었다.


특히 정치권의 힘을 꽉 잡고 있는 공산당 인사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라는 소리에 경염은 절로 그곳을 피했다. 마음이 독해졌다 하여 본래의 성정까지 잃지는 않았다. 육군 사관 생도였을 시절부터 저를 지켜봐왔던 열은 늘 그 점을 탓하곤 했다.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깨끗한 것, 더러운 것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하.”
“열.”

감고 있던 눈이 스르륵 떠졌다. 무사히 제 시간 안에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동안 정왕부 근처를 배회하는 인원이 평소보다 배는 늘었다. 앞으로는 더더욱 행동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경고였다. 깊이 생각할 때에는 관자놀이를 짚는 습관이 있는 경염의 손가락은 돌아온이후로 한시도 그 근처에서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스무 날도 남지 않은 즉위식. 사라진 교지. 예왕과 공산당의 관계.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고 있는 미미한 민주당의 세력……그리고, 매장소.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산쥬는 뭐라고 합니까? 차라리 예왕이 원래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더라면 일이 더 쉬울 뻔 했습니다. 교지가 사라지는 바람에 우리 측이 갖고 있던 패도 빼앗긴 셈입니다.”
“열.”

경염은 다시금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본디 잘 흥분하지 않는 성격인데 그런 열조차도 말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니 상황이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그래, 심각하지. 심각하고 말고.


느닷없는 웃음이 터졌다. 황실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생긴 몹쓸 버릇이었다. 웃음이라곤 씨가 마른 사람처럼 굴다가도 문득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화 대신 웃음이 나왔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현실 같지 않기 때문이다. 살아있었을 적은 이미 옛날이다. 과거다. 이젠 그날들이 꿈이 되었다.

“우리는 오래 준비해 왔다. 변수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조급해 말아라.”
“하지만 전하…!”
“그러나 네 말에도 일리는 있어. 이제부턴 나도 입장을 달리 할 생각이다.”

경염은 원래의 계획을 떠올렸다. 황실에 돌아온 뒤 그가 제일 열을 올렸던 것은 예왕의 뒤를 캐는 일이었다. 그는 현재 대륙을 장악하고 있는 공산당과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바꿔 말하자면 이는 공산당의 꼭두각시밖에 불과하다는 소리였다.


공산당은 결코 황실의 부흥과 재건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야말로 황족을 몰아내고 중국 황실의 대를 끊은 주범이었다. 또한 그들은 현재 중국의 집권 세력이었다. 이름뿐이라 해도 황실의 명맥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민주당과 국민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서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황실이란 있으나 마나 한, 기왕이면 없으면 더 좋았을. 종이 인형에 불과했다.


그러니 예왕이 황위에 오른다 해도 여전히 그들의 꼭두각시일 것이다. 과연 그가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내이던가? 예왕과 공산당 세력은 같은 배를 탄 채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짐작컨대 예왕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정치적인 세력과 기반을 재건하고 궁극적으로는 황족, 아니 황제의 정치 참여를 기정사실화 하려고 들 것이다.


이는 기왕의 뜻과 같았다. 기왕은 살아있을 적, 황족들도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유일한 황손이었다. 기개와 뜻은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너무 곧아서 부러진 사내. 시기적으로 너무 이르기도 했다. 처음에는 선황 역시 그의 뜻에 동조하는 듯 했다. 당신 또한 평생을 걸쳐 바라오던 일이었으니까.


실제로 기왕의 인기는 엄청 났다. 그는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대륙 곳곳을 오가며 국민들과 직접 교류한 유일한 황족이기도 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성시 되다시피 하는 황족이 그러한 행보를 거듭함으로서 날로 인기가 높아지니, 기존 정치권 세력의 눈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예왕은 그 틈을 타 기왕과 자신을 차별 시 하며 공산당 내에서의 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餓狗不怕打, 餓人不要臉.”

굶주린 개는 매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혼잣말처럼 읊조리던 경염의 웃음이 어느 순간 뚝 끊겼다. 그에게도 황위 계승권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다. 애초에 갈망한 적도 없던 자리였다. 모든 것은 기왕이 죽은 그해. 경염의 인생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고 갈 곳을 잃었다. 


바로 그해. 경염은 형제와 정인을 모두 잃었다.


누가 그를 굶주린 개로 만들었는가? 의문의 돌연사라고 발표한 기왕의 죽음 뒤에는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명확했다. 그의 죽음을 가장 간절히 바라던 이들. 바로 공산당이었다.


그들은 이미 기왕이 공공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말로 부황을 부추긴 전적이 있었다. 그것을 믿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나 공산당이 워낙 강력하게 주장하는 탓에 황제는 그에게 금족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기왕은 사가에 발이 묶였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황장(皇葬)을 치르지도 못했다. 


이가 부득, 갈렸다. 경염이 황실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밝혀 기왕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 잡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도 전하께서 손에 더러운 걸 묻히시는 걸 원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열.”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지금껏 몸을 최대한 낮추고 발톱을 숨겨왔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선황의 목숨이 오늘, 내일 하는 날이 올 때까지. 분명 목반 안의 교지에는 예왕의 이름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런 문제없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테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즉위식을 거행해야만 했다. 경염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기도 했다. 모순적이게도 예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바로 그날을 말이다.


즉위식은 의미로 보나 규모로 보나 전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신년 행사를 제외하면 카메라 한 번 들이지 않는 황실 내부가 공개되는 거의 유일한 날이기도 했다. 황제의 즉위식.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범국가적인 이벤트였다. 운이 나쁘면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이날만은 거의 모든 국민들이 생업도 내려놓고 즉위식에 집중했다. 모든 방송사들이 황실의 정경과 새로운 황제의 용안을 생중계로 내보냈다. 후대의 태양이 탄생하는 자리였다.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즉위식 중에는 꼭 한 가지, 빠지지 않는 관례가 있었는데 ‘황인식(皇因式)’이라 불리는 것으로 국민들이 가장 기대하는 순서이기도 했다. 황인식은 그가 황제의 본(本)에 걸 맞는 이인지 확인하는 절차였다. 쉽게 말해 황손이 맞는지, 그 핏줄을 검증받는 일이다.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자의 손가락에 바늘을 찍어 피 한 방울 짜는 것이 전부였다. 미리 풀어 둔 연꽃 물에 핏방울을 떨어뜨려 스며든 피가 흰색으로 변하면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검은색이면 황손의 핏줄이 아니라는 뜻으로 정당성을 의심받게 된다.


천자가 아닌 자가 황제가 되면 나라에 악재를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이 국민들의 오랜 믿음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황인식은 그런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식의 행사에 불과했다. 연꽃 물이 흰색으로 변하도록 미리 수작을 부려 놓고 말이다.

“채비를 해. 랑야관으로 갈 것이다.”

그날, 연꽃 물은 흰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물들 예정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예왕의 정통성을 논하기엔 부족했다. 하지만 경염 역시 가만히 앉아 황실의 세월을 버텨온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의 손에는 이미 패가 쥐어져 있었다.



예왕은, 황후 언씨의 친자(親子)가 아니다.

그것을 증명할 패가.



“지하 통로로 움직이실 겁니까? 그렇다면….”
“아니.”

준비하란 명령에 열은 아까서부터 들고 있던 코트를 그의 몸에 맞췄다. 팔부터 끼워 넣은 경염은 매무새를 정리하듯 네크라인을 따라 내려오는 옷깃을 팽팽히 당겼다. 마주한 거울 속에는 익숙한 듯 낯선, 그러나 익숙해져야만 하는 사내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문으로 간다. 차 대기시켜.”



이제 더는 숨을 필요 없으니까.
너무 오래 굶은 개는, 이미 오래 전에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도심지로부터 한참을 달려 온 검은 세단은 어두운 도로를 질주해 한산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초행길. 더군다나 말로만 듣던 랑야관의 실체를 마주하게 될 생각으로 경염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창밖의 어둠은 도깨비처럼 우글거리고, 점점 늘어나는 산등성이 사이로는 불빛 한 점 보이질 않았다. 꽤나 깊숙한 곳에 있나 보군. 전설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영물(靈物)을 실제로 접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경염은 눈을 감았다. 랑야관, 그리고…매장소. 생존한 곤족이라는 것만으로도 놀랍기 그지없는 마당에 그가 랑야관의 주인이었다니.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더 갔을까. 차는 멈췄다. 더 이상은 차를 타고 이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린 경염은 눈앞에 펼쳐진 전경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건 마치…옛 황성(皇城)같지 않은가. 규모가 작을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렇게 어마어마할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아무래도 밀약과 모략이 오가는 곳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인근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는 이 작은 성은 존재만으로도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어서 오세요. 정왕 전하.”

옛 성에 비하자면 낮았지만 성담 외벽까지 둘러진 모양새 또한 완벽했다. 성문 같은 출입구 앞에 서니 낯모르는 여인이 그를 맞이했다. 이거 참…기가 막힐 노릇이군. 여인의 차림은 과거에서 고스란히 옮겨온 듯 사진에서나 보던 복식, 그대로였다. 비단 옷을 입고 머리에는 산호초 장식을 매단 채로 고개를 조아리는 여인의 예의가 오히려 송구할 지경이었다. 경염은 잠시 아찔해졌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소?”
“종주님이 전하께서 이 시각 즈음 오실 거라 미리 언질을 주셨습니다.”

종주? 그것이 매장소를 뜻하는 말인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가 됐건 기이한 노릇이다. 어떻게 자신이 올 것을 미리 알았단 말인가? 여인의 말이 사실대로라면 그는 자신이 올 시간까지 정확히 맞춘 셈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안에 들어가니 더욱 별천지였다. 이런 곳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탕한 사내들의 웃음과 여인들의 고혹적인 분향이 뒤섞여 폴폴 휘날렸다. 오가는 사람들은 죄다 옛 차림 그대로였고, 건물의 구조나 조각상, 그들이 쓰는 작은 물건 하나마저도 다 신기한 옛 것들 뿐이었다. 황실에서조차도 이런 물건들은 더 이상 쓰지 않는다.


와중에 그나마 이곳이 꿈 속 세계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양복을 입은 한 무더기 사내들 덕분이었다. 이미 얼큰하게 취해 술잔을 부딪치느라 바쁜 얼굴들이 낯이 익다.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공산당파들이다. 아무리 허수아비에 불과했다지만 선황이 붕어한 지 고작 4일 째였다. 경염은 속으로 헛웃음을 켰다. 이곳에 온 이상, 자신도 저 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건.”
“종주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 쉬고 계소서.”
“아니, 난….”

경염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여인은 이미 문을 닫고 사라진 뒤였다. 온갖 휘황찬란한 것들로 가득 찬 방 안에는 그만큼 화려한 여인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게 뭐란 말인가. 경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언제쯤 올 것인지도 미리 알고 있던 사내였다. 그런 자라면 한 시가 급한 이때에, 고작 술잔을 기울이자고 저가 예까지 발걸음 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전하, 손님과 담소가 길어지는 바람에 조금 늦었…….”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매장소의 눈에는 이례적인 혼란스러움이 깃들었다. 어째서 이곳에 기희(妓姬)들이 있단 말인가. 정왕이 오시거든 내실로 안내해 드리라 일러 두긴 했으나 이런 대접으로 모시라곤 하지 않았다. 그가 경염의 성격을 모를 리 없다. 뿐만 아니라 기희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언짢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모두들 나가 있거라.”
“종주, 저희는 그저….”
“나가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노기가 실려 있었다. 귀한 손님이 오실 것이니, 극진히 모시라는 명령을 따른 것이 전부인 기희들만 억울한 일이다. 그녀들은 황급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이윽고 내실에는 경염과 매장소, 오롯 둘만 남았다.

“원래 이렇게 사람을 맞이하는 것이 당신의 일이오?”
“아…. 아닙니다. 전하.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차림 말이오.”

예상치 못했던 경염의 질문에 매장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림이라 함은…. 매장소는 입고 있던 자신의 의복을 돌아봤다. 그 또한 옛 복식을 갖춰 입은 채였다. 밖에 나갈 적을 제외하고는 늘 이 차림을 하고 있는 그로서는 오히려 경염의 질문이 새삼스러웠다. 랑야관에는 이것이 곧 규칙이자 법도였다. 


신기한 것인가? 제법 귀여운 질문도 할 줄 아는구나. 어찌됐든 경염이 의외의 응대에 화가 난 것은 아닌 듯 했다. 매장소는 미소를 띤 채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것도 당신이 하는 일 중 하나인가?”

그러나 그는 답할 수 없었다. 불쑥 들어온 경염의 손이 그의 턱을 쥐어 돌렸기 때문이다.






“대답하시오. 대답에 따라 내가 당신과 함께 일을 도모할지, 말지를 결정할 테니까.”



매장소의 흰 목덜미에 남은 붉은 자국.

경염의 시선이 그 위로 정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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