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03






느닷없는 손길에도 사내는 당황하지 않았다. 경염 또한 손을 거두지 않았다. 어찌 이리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싫어도 보게 되는 붉은 자국이 경염의 심기를 거슬렀다. 제가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경염은 물러서지 않았다. 탓이라면 랑야관에 들어서면서부터 도처에 흥건한 사향(麝香) 때문이다. 아니라면 바깥세상과는 전혀 다른 이곳 분위기 때문이다. 와중에도 제 탓만은 하지 않았다. 고작 두 번째 보는 사내의 목에 찍힌 자국 하나로 울컥 솟은 분노를 설명할 길이 없었기에.


하얀 목덜미에 박힌 것은 분명 누군가 남겨놓은 흔적. 먼저 온 손님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그와 무슨 짓을 하다 왔는지는 모를 수 없다. 랑야관에 난무하는 것은 비단 모략과 술수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홀리지 마십시오. 이제는 지겨운 린신의 경고에 경염의 미간이 좁아졌다. 홀리지 말라? 누구에게, 이 사내에게? 턱을 쥐고 있던 경염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렇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차분한 목소리. 웃는 낯짝. 매장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답하고는 그를 위협하는 경염의 손 위로 살며시 제 손을 얹었다. 나비가 날개 가루 뿌리는 마냥 사뿐히 내려앉은 손짓이 말했다. 화내지 마세요. 어찌 이런 일로 화를 내신단 말입니까. 덕분에 부끄러워진 것은 도리어 경염이었다. 그는 드디어 손을 거뒀다. 사내의 손이 닿았던 손등이 돌연, 뜨거웠다.

“말했던 대로요. 이것이 당신의 방식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여전히 차분하기만 한 목소리가 어린 아이를 달래듯 물었다. 이깟 일이 뭐가 그리 대수냐는 태도에 경염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불덩이를 다시 눌러 삼켰다. 몸을 팔고, 웃음을 파는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면 아닐 수도 있었다. 경염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고, 순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용인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창부(娼婦)와 손을 잡으란 말인가? 의문은 곧 말끔히 자취를 감춘다. 아니, 그런 까닭이 아니다. 목덜미에 누군가의 표식을 달고 나타난 사내를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런 반듯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주제도, 명분도 없이 벌컥 솟은 분노가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도대체, 이 사내가 대체 뭐길래.
경염은 상대를 기만한 저를 향해 자조했다.


이건 마치……질투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신의로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었지요. …아닙니까?”
“……….”
“전하께서 하시려는 일에, 또 제가 도우려는 일에. 신의나 신념이 그리 중요합니까?”

아니. 신의나 신념이 전부였던 세상은 오래 전에 불타 없어졌다. 필요하다면 이 손에도 더러운 것을 묻히겠노라고 다짐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다. 그것을 알기에 경염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말했다.

“그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오, 종주.”

경염은 금세 배운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종주. 이제는 이름보다 친숙한 호칭이었음에도 매장소의 가슴 한 켠이 뜨끔, 저렸다. 저 입으로 그리 불리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언젠간 그런 날이 오더라도 늘 오늘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이구나. 사내는 한 번 더 웃으며 제 얼굴을 덧칠했다. 들켜서는 안 된다. 아직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선택은 전하께서 하시는 것이지요. 저 또한 선택했을 뿐입니다.”
“…선택을 했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소. 당신은 무엇을 선택했단 말이오?”
“저는…….”

세상에 도리라는 것이 있다면 이유 또한 있었다. 저에게는 형님이자 은사인 기왕의 죽음에 얽힌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은폐 된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그리고 또……죄 없이 불타 죽은, 저의 소년을 위해. 이미 세상에 없는 이들을 위해 남겨진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경염의 시선은 달싹거리는 입술에 하염없이 매달려 있었다.

말해. 당신은 무엇을 위하고, 또 무엇을 선택했는지.



“…정왕 전하를 선택했습니다.”



비로소 그가 답을 주었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었다. 착각이라는 것을 안다. 허나 마주친 순간 시선의 밀도는 허겁지겁 서로를 찾는 연인의 그것처럼 애틋하고, 절박했다. 경염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를 선택했단 말이오? 그렇다면……이유는.”

일면부지 면식 한 번 없는 사내의 선택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정왕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보장된 미래를 약속해 줄 수도 없었다. 가려는 길은 휘황찬란한 비단 길은 커녕 꽃길조차 아니었다. 오히려 외롭고 고독한 길이다. 조금이라도 일이 수틀리면 잃을 것이 많은 길이었다. 하여 경염은 듣고 싶었다. 사내의 솔직한 속내가 무엇인지. 왜 가시밭길로 스스로 뛰어들려 하는지.

“…예왕은 그릇이 되질 못하는 사내입니다. 그렇지만 욕심만은 누구 못지않지요. 지금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겁니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된다면 이 나라의 정계가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란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 아닙니까.”

기다렸던 대답이었음에도 경염은 순간 맥이 풀렸다. 사내는 지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안전하고, 모범적인 답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당신에게는 득이 되는 일이 아닌가? …이곳, 랑야관에는 말이다.”


정계가 시끄러워 질수록 이곳은 문전성시를 이루겠지. 찾는 사람 또한 많아질 것이다. 랑야관에서 일어난 일, 오가는 말들은 절대 세간으로 다시 새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저는 장사치이지만 그런 식으로 장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또, 빠른 시일 안에 저 또한 위험을 피할 수 없겠지요.”


아는 것은 많을 수록 힘이 되고 독이 되는 법이었다. 양날의 검처럼 언제든 발목을 내려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나를, 선택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 경염을. 경염의 입 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사내는 지금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독을 피하기 위해 독을 삼킨다면 이 또한 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더는 캐묻지 않았다. 무슨 이유가 되었건 간에 그의 사연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닌 무게를 나눠지고 싶은 마음 역시 추호도 없었다.

“…좋소. 그렇다면 나를 위해 계책을 내놓으시오. 이제 어떡하면 좋겠소?”

착각이다.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자꾸 저를 어지럽히는 내음에 열 띤 반응을 하는 것도, 지닌 향기에 비해 수수하기 짝이 없는 저 청초함에 흔들리는 것도. 속고 싶지 않았다. 홀리고 싶지는 더더욱. 이 역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사라진 황제의 교지를 찾으셔야 합니다.”
“…교지를?”

말은 쉽지만 어려운 문제다. 애초에 그리 찾기 쉬운 물건이었다면 다들 갈팡질팡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목반은 텅 비어있었고 황제의 유서는 사라졌다. 처음 있는 일에 하나같이 혼란스러워 했다. 오죽하면 내일 있을 대회의(大會議)에서 황족의 참여가 결정되었을까. 정치적인 일정과 관련해서는 일절 출입조차 금지 된 황족이었다.


그러나 유례없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지금, 황위 계승권을 가진 두 황자만이 최초로 회의에 입회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찾지 못 한다면? 그 다음은 어찌 되는 것인가.”
“전하께서 찾지 않으신다한들 예왕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지금도 분명 혈안이 되어 교지의 행방을 찾고 있겠지요. 그 안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을 거라 확신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가 아니겠소? 차라리 이대로 교지가 없는 편이 내 쪽에선 일을 도모하기에 편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말이오.”
“교지에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을 지는 훔쳐간 자만이 알고 있겠지요. 저 또한 모르니 그에 따라 계책을 세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요컨대, 제 말은.”

매장소는 숨을 들이켰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는 것을 보니 오늘은 이만 가서 자리에 누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날’ 이후, 약해져버린 몸뚱이는 작은 자극에도 힘들어 했고 오랜 시간을 버티지도 못했다. 약도 들지 않았으며 수술로 고칠 수 있는 병도 아니었다. 생명에 위협을 주는 병은 아니었으나 천수를 누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린신의 설명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이번 일을 끝으로 멀리 요양이나 가 버려.’

매장소는 억지로 미소를 끌어올렸다. 사슴의 탈을 쓰고 여우같이 영민한 눈빛을 빛냈다.



“전하께서는 찾는 척만, 하시면 된다는 겁니다.”



‘이후로 다시는, 정왕을 만나려 하지 마. 그게 네가 오래 사는 길이야.’
린신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끊이질 않았다. 매장소는 웃었다. 그의 눈에도 저가 여우같아 보이기를 고대해 본다. 들판에서 핀 이름 모를 꽃이 아니라, 피를 뒤집어 쓴 붉은 매화처럼 보이기를.



혹여, 과거의 실마리 일랑 추호도 떠올리지 않기를.









경염이 돌아가고 난 뒤 그는 바로 침소에 누웠다. 밖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 온 건평이 저 멀리에서도 종주의 안색을 알아보고는 한달음에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어지럽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몸이 피로하면 제일 먼저 어지럼증부터 찾아와 그를 괴롭힌 지가 벌써 5년째다. 그 불타는 저택 속에서 살아남은 지는 또 8년 째. 숯덩이 마냥 새카맣게 탄 몸을 고쳐 쓸 수 있도록 만들기는 했으나, 온통 제 것이 아닌 피부로 덮은 얼굴과 몸뚱이는 매일같이 낯설기만 했다. 근육과 관절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그러니 이깟 어지럼증은 댈 것도 아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지. 그는 눈을 감았다.

“……알아보란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
“역시 종주님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그래. 대답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말은 입안에만 머물러 있었다. 겨우 모은 숨덩이를 목구멍 뒤로 넘기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렇다면, 교지를 가져간 것은 역시…….”
“예, 그자입니다.”

그렇구나. 이번에도 답을 삼킨 목구멍이 뜨거웠다. 그는 완전히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위로 어둠이 쏟아졌다. 그가 잠들 것을 알고 방을 나선 건평의 배려였다. 침소의 불이 꺼졌다. 이로써 세상은 온통 암흑천지. 매장소는 잠에 들었다.







임수의, 꿈을 꿨다.



매일 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는 일은 서재에 들리는 일이었다. 이 큰 저택에서 어린 소년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서재가 거의 유일했다. 온갖 책들이 그득 꽂혀있는 책장 사이에 파묻혀 있다 보면 하루해가 훌쩍 저물었다.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매일 저택에 머무를 수 없는 기왕은 늘 미안해하곤 했지만 바쁜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 편이 더 마음 편했다. 그래도 그가 오기로 한 날은 늘 기다려졌다.


서재의 문이 열렸다. 두 책장 뒤에나 있는 문이었지만 그 소리는 귀신같이 알아들은 소년이 읽던 책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섰다. 형님! 사건의 후유증으로 열리지 않는 말문 대신 마음속으로 힘껏 외치며 도도도 달려갔다. 그러면 기왕은 어찌 알아들었는지 두 팔을 양껏 벌리고선 넓은 품에 끌어안아 주었다. 그럼 저는 거기에 폭 안겨 어리광을 부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기다렸던 형님이 아닌 낯선 사내였다. 본 적 있는 얼굴이다. 저택에서 일하는 가솔 중 하나였는데, 몸집이 비대하고 얼굴에 흉터가 있어 평소에도 그를 무서워하곤 했다. 소년은 그의 상태가 심상찮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얼굴에 걸쭉한 웃음을 띠고선 실실 쪼개며 다가오는 모양새가 섬뜩했다. 소년은 그런 눈을 한 자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주춤거리는 가벼운 몸이 뒷걸음질을 쳤다.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터벅, 터벅. 다가올 뿐이었다. 사내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소름이 끼쳤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 뒤를 가로막은 것은 육중한 책장. 서재는 기왕과 소년이 주로 드나들었고 평소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도 않는 곳이다. 기왕이 그리 명령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리지만, 곤족의 향기를 폴폴 풍기는 소년을 위한 배려였다.

“아! 아, 아아…. 아!”

겁에 질린 소년이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여전히 목에서는 쉰 소리만 나오는 것이 고작. 이제 사내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소년은 그날 밤을 떠올렸다. 금수만도 못하던 밤. 교성 아닌 비명이 가득 했던 마을. 불타는 가채들 사이로 헐퍽대던 허리 짓. 남을 짓밟은 쾌락으로 일그러지는 얼굴…. 소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늘 목에 걸고 옷 속에 숨겨 놓던 은색 단도를 움켜쥐었다.




“지금 뭐하는 건가.”




여차하면 그 눈깔에 칼을 꽂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사내도, 소년도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괴물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온순한 가축이 되었다. …형님? 아니, 기왕이 아니다. 그보다 더 작은, 그러나 단단한 그림자.

“이곳은 기왕 형님이 가솔들의 출입을 금지한 곳이 아닌가.”
“……저, 그것이….”
“물러가라. 한 번 더 이런 일이 눈에 띄면 바로 형님께 알릴 것이다.”

소년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정왕’. 아니 ‘경염’이라고 했던가. 저번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음에도 소년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가 낯선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군 사관학교의 교복이었다. 반듯하게 떨어지는 옷깃이 칼끝처럼 예리했고 딱 맞물리는 재단선은 피부를 한 겹 더 입은 양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군화까지 눈길이 미치자 소년은 저도 모르게 움찔, 물러섰다. 저 신발을 알고 있다. 마을을 짓밟은 사내들이 신고 있던 것이다.

“괜찮아?”
“아…….”

한 발자국 다가가자, 소년은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뒤로는 피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곤혹스러워진 그의 표정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다정했으나 무뚝뚝한 성격 탓에 말주변이 그리 좋질 못했다.

“저…. 우리, 전에 인사하지…않았나?”

방금까지도 저보다 훨씬 어른인 사내를 꾸중하던 자는 어디로 갔는지, 한껏 풀어진 말투로 버벅 거린다. 냉정한 시선으로 적을 쏘아보던 눈은 어디에도 없다.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손길이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몇 번이고 서성거렸다. 그 어수룩한 모습에 소년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오늘 형님이 오신다기에, 그…아직 안 오신 모양이지? 아, 그 너 말을 못한다고…. 아니, 그래. 그게 아니라.”
“……….”

소년은 용기를 내어 그에게로 다가갔다.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 말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행동밖에는 없었다. 비로소 거리가 가까워 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 경염은 얼굴을 붉혔던가. 아니던가……



소년은 냉큼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 기억났다.



얼굴을 붉혔었지. 보는 내가 다 수줍어질 정도로.







꿈에서, 깬다.

스르륵 열린 눈꺼풀이 시야를 헤아린다. 불을 켜지 않아도 밝은 것을 보아하니 벌써 아침나절이 된 모양이다. 적어도 십오야 동안에는 아예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할 생각이었는데 첫 날부터 그르쳤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꿈에 어린 경염도 나와 주었다. 매장소는 설핏 웃었다. 퍽 황량한 것이, 쓸쓸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으나 엿 볼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곤족이 몰살되던 밤. 겨우 살아남은 소년, 임수는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렸다. 생각하거나 글을 쓰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 기왕과의 대화도 주로 필담(筆談)으로 이루어졌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조금도 걱정스럽지 않았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멀쩡한 두 다리가 있었다. 매일 밤 악몽으로 찾아오는 끔찍한 기억들이 맘에 걸리긴 했지만 적어도 행복한 척은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여행 중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곤족의 마을을 찾아 온 기왕이 아니었더라면 저 역시도 겁간 당한 뒤 불에 타 죽은 목숨이었을 게다. 우연 같은 운명이었다. 그 운마저도 3년을 채 버티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던 시절이다. 기왕이 있었고, 경염이 있었고, 임수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경염은 종종 짬이 날 때마다 저택에 들리곤 했다. 처음에는 기왕도 없는데 부러 발걸음 하는 그가 의아했다. 올 때마다 작은 선물을 쥐어주는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저 친구가 생겼다며 좋아라 했을 뿐이다. 순진하기도 하지. 과거의 저를 떠올리며 매장소는 또 설핏 웃었다.


하루가 다르게 뜨거워지던 그 눈빛을 진작 알았더라면. 해를 거듭할수록 남자가 되어가던 그를 조금이라도 일찍 눈치챘더라면.



그랬다면, 우리.
……조금 더 행복하고, 지금 더. 불행하지 않았을까.




“일어나셨습니까. 종주.”
“…그래, 아침 식사는 되었다. 생각이 없어.”
“의사 양반이 절대 끼니를 거르지 말라지 않았습니까. 몇 숟갈이라도 드세요.”


매장소는 제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건평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 또한 살아남은 곤족 중 하나였다. 정확히는, 곤족을 지키는 건(建)족의 몇 안 되는 후예들 중 하나였다. 그 수가 곤족보다 훨씬 적어 나중에는 같은 일족으로 합류하였으니 매 한 가지인 셈이지만.

“자는 동안 무슨 일은 없었느냐.”
“아직까지는 조용합니다. 인민 공화국 대 회의는 오늘 오후 2시에나 열릴 테니 그 전까지는 잠잠하지 않을까 싶네요.”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내게 알려 주고.”

결국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킨 매장소가 침대에 기대앉았다.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안 좋아진다는 것은 다른 이보다도 저가 제일 잘 알았다. 하루라도 더, 멀쩡히 살아있으려면 주치의의 말을 들어야 했다. 백발이 희끗한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태 정정한 의사였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삼합회의 주요 간부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하니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린신은 그런 대단한 자를 선뜻 매장소의 주치의로 붙여주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종주, 정왕부에서 보낸 것이 있습니다.”
“…뭐?”
“방금 전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일어나신 것 같아서 챙기다 보니….”
“당장 갖고 오게. 당장.”

혹여 이런 일이 있을까봐 잠을 줄이려 한 것인데, 매장소는 건평이 내려놓은 식사 쟁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황급히 사라지는 그의 뒤꽁무니만 살폈다. 설마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주시하고 있는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보고는 없었으니 큰 일이 난 건 아닐 텐데.


분명 어제의 경염은 몹시 기분이 상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럴 테지. 그는 틀림없이 제가 엄한 짓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성정으로는 몸을 팔아 계략을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표식을 보인 제 잘못이 컸다. 보이려고 보인 것도 아니지마는…. 매장소는 초조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제 일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비단 경염만이 아니었다.

“여기 있습니다.”

“…이걸 정왕부에서 보냈다고?”

작은 상자였다. 매장소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상자를 풀어헤쳤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또 다른 상자. 핸드폰이었다. 매장소는 그제야 둘 사이에 어떤 비상 연락 수단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것을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을 오히려 경염이 먼저 알아차리고, 행동하도록 두다니, 책사로서는 실격이다.


그는 비로소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감정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밀려드는 옛 기억에 시간도, 머리도. 자주 멈췄다. 천하의 매장소도 별 수 없는 인간인가 보지. 그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핸드폰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와 있었다.




[급한 연락은 이쪽으로 하길 바랍니다.]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 점이 경염다웠다. 옛날부터 기계나 새로운 물건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편지 등의 문장을 만드는 데에는 더욱이 재능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 짧은 한 줄에 안도하게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매장소는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가, 자신을 ‘선택’ 했다.
그 예전에도, 또 지금도.






자신이 그를 선택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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