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04









대 회의는 2시입니다.

열의 보고가 아니더라도 익히 알고 있는 스케줄이었다. 대 회의. 전국의 모든 의원 중 50명만이 참석할 수 있는 회의로 그 중 공산당 의원석만 41석이나 된다. 고작 9석을 차지한 민주당 의원들 중 정왕부에 드나드는 의원은 단 2명. 자신이 참석한다 해도 수적으로는 절대로 불리한 자리였다.


경염의 시선은 거울 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어젯밤 내내 밤을 설친 남자가 있다. 넥타이를 끝까지 조인 뒤 수트 재킷을 가볍게 잡아당긴다. 구김살 하나 없는 하얀 셔츠와 흠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구두. 손목에 시계를 채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점검이 끝났다.


거울 속에는 아무리 괴로워도 내색 할 수 없는 남자가 있다.

8년 동안 단 하루도 편히 잠들어 본 적 없던 남자가.


경염이 그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다. 곤족은 예로부터 기린재자(麒麟之才)가 나는 민족이라는 설이 있다지. 하늘이 먼저 알아보고 내려주었지만 정작 땅에서는 손가락질 받는 이들. 경염은 그에 걸어 보기로 했다. 비단 전설이나 풍속에만 의지한 결정은 아니었다. 매장소는 어제 자신이 그를 찾아갈 것을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생전 랑야관 쪽을 향해서는 시선조차 준 적 없었는데.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의 말이 옳다. 이 일에 신의나 신념은 필요 없다. 중요한 건 제가 황위에 오르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혹시 또 모르지, 흔들릴 지도. 정(情)에 약한 것은 타고난 성정이나, 다행히도 그 정을 나눠줄 이는 전부 세상에 없다. 그는 자유로웠고, 그렇기에 고독했다. 경염은 거울 속의 남자를 향해 매일 애도했다.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나?”
“예. 사방으로 수색하는 중이나,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건질만한 건 없었나 봅니다.”

황제의 교지를 찾아라. 정왕부에게 주어진 미션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cctv를 조사하고, 의심스러운 자들을 추적할 것. 용의자를 좁히고 가능성 있는 경우의 수라면 뭐든지 내어 놓을 것. 이런 일들은 꼭 정왕부가 아니더라도 가능했다. 오히려 이미 각 기관에서 한 바탕 뒤집어 놓고 갔을 것이 뻔한데 왜 ‘찾는 척’을 하라고 했는지가 의문이었다.


“핸드폰은 어디에 있지?”
“여기 있습니다.”

경염은 밤새 한 번도 울리지 않았을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를 선택하기로 결정한 순간, 그와 자신에게는 연락 수단이 필요했다. 린신에게 말했더니 불과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쓸 만한 핸드폰을 보내왔다. 원래의 소유주를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모든 메시지, 전화 기록은 감시나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이 함께였다.


경염은 핸드폰에 어떤 연락도 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곤 손에 꽉, 쥐었다. 멀쩡한 척 하고는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뒤틀렸는지 모를 속에 경염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엇에 동요하고, 또 무엇에 흔들리는지. 모를 일이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경염은 제 손안에서 울어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곧 통화버튼을 눌렀다. 서로의 핸드폰 안에는 오직 서로의 전화번호만이 입력되어 있었다. 고로 발신인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말하시오.”
-오늘 2시에 대회의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하.

여보세요. 내지는 지난밤에 대한 안부는 일절 무시된 채 둘은 필요한 대화에만 집중했다. 경염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슬쩍 열고는 주변을 살폈다. 하나같이 황궁의 경호원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저 중 태반은 예왕의 사람일 것이다.

“그렇소만. 그에 관해 할 말이라도 있는 거요?”
-분명 예왕부에서는 전하를 범인으로 몰려고 할 것입니다. 과반석이 넘어가는 공산당 의원 중 스무 명은 이미 예왕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크게 염려하실 것은 없습니다. 민주당 측에서 전하의 손을 들어줄 테니까요.
“민주당 의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내 편이 되어 주리란 보장은 없소. 그 중엔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한 자들도 있소. 그런데 어찌 그 점을 확신한단 말이오?”
-그 부분은 제가 이미 손을 써 두었습니다.

그대가? 도대체 어떤 수를 부려서. 경염은 무덤덤한 얼굴로 커튼을 내려놨다. 햇빛이 차단 된 공간은 방금 전보다 어두웠다. 경염의 낯빛 역시 함께 어두워졌다. 설마, ‘그대의 방식’ 대로 얻은 결과란 말인가.

-민주당 의원들은 정계에서의 힘은 약하지만 재벌가 등, 재계 측에선 상당한 힘을 발휘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입니다. 비단 오늘이 아니더라도 즉위식 전에 또 한 번 회의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회의에서는 전하가 교지를 훔친 범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민주당 의원들이 전하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확신에 차 말하는 매장소의 목소리를 들으며 경염은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첫째.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와중에 민주당이 제 편을 들어준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려봤자 무엇이 이득이란 말인가. 둘째. 오히려 지금으로선 공산당의 힘을 빌려와야 하는 것이 이득 아닌가.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민주당을 끌어들이면 오히려 공산당과의 접점은 점점 더 만들기 힘들어질 것은 자명했다.

“…알았소. 일단 그대의 말 대로 할 것이오.”
-전하께서 이 정치판에 계시다는 것, 그리고 황위를 이을 두 황자 중 하나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셔야 합니다. 오늘은 그런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고하도록 하지.”

통화는 일단락됐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끝도 분명했다. 더 이상 상대의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는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 보다가 전원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더 이상 어떤 정보도 출력하지 않는 제 손바닥만 한 기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던 사내가 곧 재킷 안에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이제 고작 13일 남았다. 시간은 당장 눈앞에 닥쳐 촉박하기만 한데 머릿속이 자꾸 다른 생각을 한다.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또.


조금도 닮지 않았음에도 임수를 떠올리게 하는 사내가 놀라웠다. 고작 같은 민족(族)이라는 이유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게라도 살아있는 누군가와의 공통점을 빌어보고 싶은 제가 애석하고 구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어리석었다. 왜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을 놓지 못하는가.


그날, 기왕의 저택이 불타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형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달려오지 못했다. 황상의 건강이 나빠진 탓으로 부름을 받고 환궁한 뒤 여태 황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황망한 마음을 안고 달려왔을 때엔 이미 삼일 장례가 끝나던 중이었고 그의 사가는 불타고 있었다.


불, 타오르는 불길. 경염은 지금도 화재 현장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화재의 잔상은 혹독한 잔재로 남아 매번 악몽 속에 등장하는 단골이 되었다. 겨우 저택을 탈출한 가솔들,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소년.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끝까지 저택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날따라 더디게 굴던 소방관들이 도착했을 때엔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저택은 새카맣게 불탔고, 임수는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소년으로 추정되는 시체가 하나 있긴 했으나 뜨거운 열기에 유골마저도 조각조각 났다는 소리에 그저 속으로만 신음했다.



울기는 했던가, 아닌가.
……8년 전의 기억은 이제 희미하기에도 모자라다.



그날 이후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병에 걸렸다. 경염은 쓸데없는 생각, 필요 없는 사람을 아예 뇌리에 넣어두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 중 생존자의 뒤를 추적했다. 그날 이후로 돌연 자취를 감춘 사내가 하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의 조사는 박차를 가했다. 형님의 죽음이 돌연사가 아니라면, 그 저택에 번진 불길도 결코 우연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범인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즈음까지 왔는데.



역시 포기할 수 없다. 물러날 수는 더더욱.
경염은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날이 선 사내가 있다. 담금질 당한 남자가 있다.


“정왕 전하. 이제 회의장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꼭, 이겨야만 하는 남자가. 남자는 저를 두고 돌아섰다.









웅성거리는 소음, 서로를 견제하는 눈빛과 절대 곱지 않은 평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약점을 찾으려 혈안이 된 시선들. 그 정 가운데에 앉아있는 정왕의 한쪽 입 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재밌는 늙은이들. 각기 다른 입장에 서 있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천편일률 똑같았다.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재물. 서로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경염의 시선이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고작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많은 것이 바뀌었다. 목반은 텅 비어있고 다음 황제의 행방은 묘연해졌으며 그럼에도 즉위식은 1분 1초마다 다가온다. 와중에 대 회의까지 비상소집 되고 다음 황제가 될 두 사람이 모두 회의에 참석하는 진풍경까지 그려졌다. 그것만으로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공산당의 늙은 개들이 있다. 모르는 바는 아니다. 경염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절대로, 흠 잡힐 만한 구석을 주셔서는 안 됩니다.’ 문득 매장소의 목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렸다.

“아직도 선황의 교지를 찾지 못했단 말이오?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역시. 예상했던 대로 예왕이 제일 먼저 나섰다. 처음으로 참여하는 회의임에도 주눅 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 퍼포먼스의 대가로 자신을 지목하게 되리란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기에 마냥 감탄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범인이 누구인 줄은 모르겠지만…….”

하면서 슬그머니 저를 바라본다. 말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지 지목이나 다름없다. 경염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정왕부에서는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이 투입되어 교지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즉위식이 13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설 기관에도 따로 협조를 부탁했으니 분명 그에 따른 결과가 나올 겁니다.”
“즉위식 전에 교지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느닷없는 질문에 경염의 시선이 움직였다. 늙고 고집스런 얼굴을 한 노인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경사…하강. 정왕 역시 그 얼굴을 익히 알고 있었다. 황궁 내무부인 현경사의 수장이자, 선황의 생전, 그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는 유일한 자.


그러나 교지를 잃어버린 이상 현경사는 책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당장 책임자였던 하동은 집행유예와 함께 감금되었다. 만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엄중한 처벌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강은 살아남았다. 정치판에서도 쉬이 손 댈 수 없는 자였다. 이 자는 지금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걸고 넘어 지는지 알 수 없다. 예왕의 편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로지 황제만을 위해 일하다는 현경사의 수장이다. 그리고 지금, 누가 다음 황제가 될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소.”
“오호라, 정왕 전하께서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현경사의 하강은 자존심이 그리도 세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가 대단하다고 말이다. 여태 현경사도 찾지 못한 황제의 교지를 선뜻 찾겠다고 나선 정왕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소. 어떻게든 찾아내어, 선황의 유지(遺志)를 받들 것이오.”

그러나 이쪽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경염은 최대한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좌중이 술렁거렸다. 하강은 대 회의에 참석하는 인원 중 황족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당파가 없는 존재였다. 황실의 일을 처리하는 기구인 현경사의 수장으로서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철칙이자 신조였다. 그런 그가 정왕과 대척점에 서게 된다면…. 예왕은 씩 웃었다. 아무래도 하늘이 제 편을 들어 줄 모양이었다.

“아직 현경사에서 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오. 어찌 그리 확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왕?”
“누가 찾든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찾는다는 거지요.”

어느 쪽도 물러서거나 보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왕은 조금 놀랐다. 정왕이 이토록 분명하게 제 의견을 주장하는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회의 자체가 낯설기도 했지만 그는 주로 침묵하고 방관하는 쪽이었지 겉으로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도대체 뭘 믿고 저런 소리들을 한단 말인가. 예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정말로 그가 교지를 가져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마치 교지의 행방이 어디 있는 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구는구려, 정왕.”

이에 경염의 미간 역시 확, 좁혀졌다. 그가 한 마디 하려던 차 였다.

“예왕 전하, 불충한 줄은 알지만 한 마디 올리겠습니다.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발언은 삼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뭣이라?”

“그 말씀만 듣고 보면 마치 정왕 전하께서 일부러 교지를 감춘 것처럼 들리는데,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중이 그런 것입니까?”

정확하게 파악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민주당의 언궐. 당파 내에선 가장 발언권이 강한 자이지만 경염과는 어떤 교류도 없었다. 경염은 매장소의 말을 떠올렸다. ‘그 부분은 제가 이미 손을 써두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이번 일이 너무나 기이하고 해괴한 일인데다가 정왕의 태도가 너무나 확신에 차 있기에 그리 말한 것이오.”
“이번 사건은 황실의 중대사입니다. 일의 경위와 과정, 결과를 명명백백하게 밝혀 중국 황실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경염은 모두의 말을 자르고선 다시 나섰다. 그가 여기 있고, 오랫동안 존재해 왔음을 알려라. 그것이 매장소가 저에게 준 미션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경염에게로 향했다. 그는 본 적 없던 태도를 고수하며 전면으로 나섰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그 태도가 석연찮은 것은 예왕은 물론 공산당의 당파들이었다.


황족이 회의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가 주도적으로 회의의 분위기를 이끄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미리 정왕의 뒤를 캐보기도 했으나 자신의 신분으로 무엇 하나 이득을 얻으려 한 적이 없어 털어도 나오는 것은 먼지 뿐이었다. 때 묻지 않은 적이야말로 이 정치판에선 가장 곤혹스러운 상대였다.


어쨌든 오늘 회의에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즉위식을 13일 남겨둔 지금, 마땅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 후, 그때까지도 선황의 교지와 범인을 잡지 못하면 다음 대안을 강구해 봅시다.”


회의는 끝났다.


예왕과 정왕이 가장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형제라고는 해도 둘은 사석에서 만난 적은 없음은 물론, 서로 안부 한 번 묻을 적 없는 버석한 사이였다. 먼저 붙잡은 것은 예왕이었다. 말을 섞어본 지가 언제였던가. 경염은 몸을 돌려 형제를 응시했다.

“무슨 속셈이냐. 정왕.”
“속셈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적법하고 합당한 절차를 따를 뿐입니다.”
“이런다고 네가…!”

높아지려던 언성이 잠시 멈추었다. 주변의 눈을 의식한 것이다. 예왕은 정왕의 어깨를 붙잡고 귓가에 소근 거렸다.

“…황제가 될 수 있을 성 싶으냐?”

그 말에 정왕은 터지는 실소를 금할 수 없어 그만 웃었다. 급하긴 어지간히 급하신 모양입니다. 형님. 정왕은 이제야 회의실을 하나 둘씩 빠져나오는 당원들을 흘끗거리고는 제 어깨에 놓인 예왕의 손을 살짝, 떨어트렸다. 그는 웃는지 아닌지 모호한 미소로 답했다.



“하나 말씀 드리자면, 제 속셈은…형님의 속셈과 같습니다.”

그가 권력을 향해 내보인 최초의 야욕이었다.










어제, 오늘 많은 일이 있었다. 경염은 피곤한 기색으로 이제 막 코트를 벗던 참이었다. 곁에 있던 열이 그의 코트를 건네받았다. 식사를 물리고 대신 술을 들였다. 독주는 즐기지 않지만 오늘은 멀쩡한 정신으로는 아예 잠들지조차 못하리란 예감이 그를 부추겼다. 온 더 락 글라스에 채운 얼음과 위스키. 생각은 길고, 끝이 없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핸드폰. 경염은 문득 핸드폰을 떠올렸고, 그것이 코트 안 주머니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

역시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오늘 회의가 어땠는지, 무슨 일은 없었는지. 물어볼 법도 하지 않은가. 경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켰다. 뭘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그깟 연락이야말로 뭐가 대수라고. 경염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아직 한 모금도 채 대지 않은 위스키 글라스를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경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매장소가 아니다.

“누구냐.”

한 순간에 날이 선 목소리가 상대의 신원을 물었다. 그들의 연락 수단은 매장소 외에는 존재조차 알지 못해야 한다. 그런데 감히 누가. 상대와 매장소에 대한 분노가 순간 치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저는 건평이라고 합니다. 지금 종주께서 전화를 받으실 수 없는 상태라 제가 그만….
“매장소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일단 의심스런 상대가 아니라는 데에 안심했다. 경염은 비로소 한 모금, 목을 축였다.




“…종주님이 두 시간 전에, 쓰러지셨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경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서방(書訪)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