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06









소년은 흑복(黑服)을 입고 있었다. 여기 있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옛 사진에서나 볼 법한 의복은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자객처럼 날랜 몸짓에서 다소 놀라울 수 있었으나, 얼굴을 조금도 가리지 않은 당당함은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느껴졌다. 덕분에 소년이 방금 제 목에 칼을 들이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보다는 저를 부르던 이름이 더욱 의문이었다.


‘물소’. 분명 저 어린 자객은 자신을 물소라고 불렀다. 경염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뿐더러 잊을 수도 없었다. 수야, 네가 처음으로 불러 준 이름이다. 경염은 획이 많아 쓰기 불편하다며 제 멋대로 지은 이름이었다. 왜 자신이 물소인지, 그 이름의 어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이유는 듣지 못했지만.

“물소.”
“그러니까 왜 날 그렇게….”
“물소를 물소라고 부르지 뭐라고 불러.”

소년은 퉁명스레 답했다. 어딘지 모르게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에는 방금 전의 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른 손에 들린 단도는 여차하면 다시 제게로 향할 듯이 번쩍거렸다. 경염은 소년을, 정확히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설명으론 경염을 이해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못 들은 척 넘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경염이 다시 물으려 하던 찰나였다.

“……전하?”

부르는 목소리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눈에 띌 정도로 화들짝 놀란 고개가 뒤로 돌아 상대를 살폈다. 매장소가 깨어났다. 방금 막 잠에서 깬 눈꺼풀 위에는 여태 졸린 기운이 묻어났다. 동시에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정신이 번쩍 든 경염이 차마 뭐라 대꾸를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던 차였다. 방금 전, 제가 그에게 했던 짓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하얗게 얼굴이 질린 매장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비류!”

부름에 깜짝 놀란 소년이 몸을 움찔 떨다가 곧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혼낼 때의 목소리는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들고 있던 단도를 뒤로 숨기는 것을 보니 제 잘못을 아예 모르진 않는 모양이다. 깨어나자마자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어찌하여 비류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또 경염이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매장소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 모습에 경염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부축했다.

“괜찮은 것이오? 또 어디가 아픈 것이오?”
“아니, 아닙니다. 그저 잠시 어지러운 것뿐이니….”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비류의 오른 손에 다시 힘이 실렸다. 허나 그뿐이었다. 또 다시 호통을 듣고 싶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모두 부루퉁하게 내민 입술 안으로 집어넣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도 모른 채 저만 꾸중하는 주군의 태도에 뿔이 났기 때문이다. 허나 물소든 누구든. 주군의 허락 없이 그를 만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비류, 어서 전하께 사과드려라. 도대체 왜 칼을 든 게야.”
“안 해.”
“비류!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것이냐?”
“안 해!”

소리를 빽 지른 비류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이제 보니 자객이 아니라 호위(護衛)인 모양이다. 요즘 말로는 경호원 쯤 되겠군. 멍하니 둘의 말다툼을 보고 있던 경염의 시선이 다시 매장소에게로 향했다. 많이 놀랐는지 가슴을 들썩거리며 숨을 내쉬고 있는 그의 상태가 영 불안했다. 환자이니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던 린신의 말에 응당 그러마고 했던 약속이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경염은 제 입술 안쪽을 꾹, 씹었다.

“미안하오.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소.”
“…아닙니다. 아마 비류가 전하를 알아보지 못하여 저에게 해를 끼치려는 줄 알았나 봅니다. 아직 어리고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아이이니…. 부디 비류의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렇기엔 소년은 분명 저를 ‘물소’라 불렀다. 경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년이 말해주지 않은 답을 그라도 대신 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 편으로는 물어선 안 될 것을 묻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아니오. 별로 마음에 두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경염이 소년의 무례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제가 벌인 무례 또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창백한 옆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잠시 잊었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경염. 아무리 자책하고 타일러 봐도 있었던 일을 없는 양 치부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염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만약 그때 소년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가 멈출 수 있었을 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아니야. 그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탐했을 테지. 참을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참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리 되었다면……. 어찌 사내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을까. 무례에 대해 꾸짖기는커녕 소년에게 고마워해야 할 참이었다. 얼굴에 핀 열꽃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몸에 돋은 뜨거운 기운도 채 사라지기 전이었다. 경염은 매장소로부터 한 걸음, 떨어졌다. 그가 또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별개로 두 사람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제 몸이 약하여 본의 아니게 심려를 끼쳐드린 것 같습니다. 자주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말, 믿어도 되겠소?”
“정말입니다. 그저 가벼운…빈혈일 뿐입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할 뿐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선의의 거짓말이라 한들 그 내용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경염의 눈썹이 찌푸려지던 것도 잠시, 그는 곧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말없이 매장소를 응시했다. 내게 버릇처럼 거짓을 말하는 사내다. 그리 생각하니 또 울컥한 마음이 솟아 심기를 어지럽혔다. 경염은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팔에 걸치곤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나올 필요는 없으니 가만히 누워 계시오.”
“허나, 전하…….”
“아픈 사람에게 화내고 싶지 않다는 말이오.”

딱 잘라 그의 머뭇거림을 자른 경염은 돌아섰다. 등 뒤에 닿는 시선을 안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이불을 말아 쥐고 있을 손가락까지. 문득 손바닥에 닿았던 그 감촉이 떠올라 마음이 들쑥날쑥 흔들렸다. 평소라면 일부러라도 마음을 흔드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잔잔한 수면 위로 돌을 던지는 취미 또한 없었다.


하지만, 저 역시도 사내에게 불만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방을 나서려던 경염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섰다. 마주치지 않는 시선은 엇갈려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느끼고 있을 터였다.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따라서 범람하는 의문이 있었다. 물음표는 아직 마침표가 되지 못했다.




“…아까, 비류가 나를 ‘물소’라고 부르더군.”




다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인정할 수 없을 뿐이다. 경염의 모습이 문 뒤로 사라질 때까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선만이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쫓았다.









식지 않은 열이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 있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그를 괴롭히던 열병이 점점 더 지독해졌다. 덕분에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뜨거운 숨을 토하는 입술이 바싹 말랐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냐는 열의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선 방으로 돌아오기까지 고작 몇 분. 그 짧은 시간도 지금의 경염에게는 버거웠다. 아무렇게 벗어던진 코트를 뒤로 하고 침대 위로 몸을 던진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과열된 생각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묻는 질문에는 그 아무도 답해주질 않는다. 분명 모든 조각들이 제 손안에 있음에도 퍼즐은 여전히 미완에 그쳤다. 그려지지 않는 그림에 애가 탔다. 경염은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기 위해.


8년. 자그마치 8년만이다. 지고한 순정이 느닷없이 고개를 든 욕정에 무참히 짓밟혔다. 그 기분은 실로 더러웠으나 부정할 순 없었다. 경염은 벌떡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뜨거운 눈 주변을 문지르는 손바닥 끝에도 여즉 열 기운이 남아있었다. 미쳤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홀렸다. 그러나 그런 말로 그에게 탓을 미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침대에 누운 경염의 머리 위로 상념이 아른거렸다. 상념은 형체가 없어 잡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지 괜한 헛손질이 허공 위로 맴돌았다. 새벽은 으슥해진 지 오래였고, 생각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다. 침대 속으로 파묻히듯 미끄러진 경염은 과거를 떠올렸다. 이제는 다 잊어버렸노라 묻어두었던 꿈을. 그러나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던, 꿈을.







소년들의 대화는 말없이도 가능했다. 언제 목소리를 되찾을지 알 수 없는 임수의 상태가 걱정이 되면서도 저를 향해 말없이 웃어주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뭐든 좋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할 적에는 말이다.


사랑을 앓아본 적 없는 소년의 세상에서 성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황실의 핏줄로 태어났다는 책임감 또한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제 감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또 그 감정이 결국 결실을 맺을 수 있을지. 다분하기만 한 생각들은 아무 의미 없었다. 좋으니까. 맥없이 읊조리는 그 한 마디만으로도 괜히 가슴 벅차오르는, 그 시절의 세상은 어딜 둘러봐도 온통 찬란했다.

“샤오수.”

부르면 저를 바라보는 이가 있다. 키는 엇비슷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늘 저보다 왜소하게 느껴지던 소년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경염은 터질 듯 뛰는 심장에 말문이 막혔다. 저가 불렀음에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양 고개를 푹 숙인 경염의 귓가와 목덜미까지 온통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왜지. 나는 왜 이렇게 네가 좋은 거지. 왜 네 생각만 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을까. 지금처럼 네가 가까이 있기라도 할 때면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그래도 부르고 싶어. 네가 나를 봐 주니까.


하지 못한 말들이 산처럼 쌓여만 가도, 그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있잖아, 수야.”

이제 곧 환궁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번에 돌아가면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겠노라 선언할 참이었다. 그래야만 황궁을 나와 살 수 있기 때문에. 어차피 황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기왕 형님이 떡하니 버티고 있음에도 벌써 제자리 마냥 점찍어둔 예왕 형님의 눈치를 보는 것도 지겨웠다. 지금까지는 기왕 형님의 말에 따라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제 마음은 굳어졌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지금처럼 임수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기왕 형님이 황제가 되거든 말이다. 그때는 말이지.”

여기서 말고, 나랑 살자.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음에도 이상하게 헛돌기만 하더라. 부끄러움 탓이다. 누구의 앞에서도 얼굴을 붉혀본 적 없었던 경염의 얼굴은 임수만 곁에 있으면 쉬지 않고 타올랐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아냐, 나중에 얘기하자.”

멍청한 놈. 소 경염, 배포도 없는 놈. 그깟 한 마디 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허나 기왕 형님을 따르는 임수가 제 청에 응해 줄지가 의문이었다. 어차피 형님이 황제가 되면 이 넓은 저택에 임수 혼자만 남게 될 텐데. 그런 핑계를 대어서라도 던져 볼 법한 말을 왜 속에서만 썩히고 있는 지 모를 일이다. 그런 경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수는 곧 손에 쥐고 있던 스케치북에 뭔가를 적어 그를 향해 내밀었다.

‘물소, 너무 고민하지 마. 다 잘 될 테니까.’


응? 되묻는 얼굴이 너무 순진해 보여 경염은 침만 꼴깍 삼켰다. 뭔줄 알고 그런 말을 해. 제 속을 모르는 임수가 못내 원망스러우면서도 결국에는 웃음이 터졌다. 그래, 다 잘 되겠지. 네가 평생 목소리를 내지 못해도. 또 내가 더 이상 황자로서 살지 못하더라도. 할 줄만 알면 뭐해. 어차피 뱉지도 못할 말들은 크게 의미 없었다.


내 곁에는 네가 있지 않니. 그리고 네 곁에는 내가 있을 거고 말이야. 경염은 아무 말 없이 임수의 손을 꼭 붙들었다. 닿은 손이 어찌나 화끈거리는지. 거기에 온통 신경이 쏠려 제 곁에 앉은 소년의 얼굴도 붉어졌음은 차마 몰랐다.







그럼에도 끝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줄곧 건강이 좋지 않았던 황상이 드디어 병상에 누우셨다는 비보와 함께 모든 황손들에게 황궁으로의 환궁령이 떨어진 것이다. 한 번은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느닷없는 환궁령은 경염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질 않았다.


만약 이대로 부황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자신은 꼼짝없이 황궁에 발이 묶일 것이 분명했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아니겠지. 다 잘 될 거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면서도 임수의 방문을 두드리는 손길에는 어쩐지 힘이 없었다.

“샤오수.”

그럼에도 부름만은 늘 사랑스러웠다. 샤오, 수.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리는 이름은 소년을 닮아있었다. 드디어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얼굴에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그런데 왜 일까. 왜 오늘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문간 너머에서 제 눈치를 보는 임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경염은 그만 그를 왈칵,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나 안고 있었을까. 어쩔 줄 모르던 두 팔이 드디어 제 등 위로 가라앉았을 때. 경염은 그만 안도하고 말았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들릴 리 없는 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나는 내일 황궁으로 돌아가야 해.”

응, 응.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손길이 자신의 등을 다독일 때마다 그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바보야, 언제 돌아올지 모른단 말이다. 차마 그 말만은 할 수 없었다. 소리 내어 말해버리면, 정말로 그렇게 될 것만 같은 어린 마음에.

“…뭐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거긴 훨씬 큰 도시니까. 올 때, 내가 가져다줄게.”

경염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정말로 울어버리면 그거야말로 낭패였다. 다행히도 임수는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갖고 싶은 거? 가만히 보고만 있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올 때마다 작은 선물을 쥐어주는 경염이었지만 굳이 묻는 일은 없었다. 멀뚱히 서 있던 임수는 제 책상으로 가 스케치북을 집어 들고는 뭔가를 끄적거렸다.

‘진주. 계란만한 진주.’

“……진주?”

되묻는 목소리에 쥐고 있던 펜이 다시 빠르게 사각거렸다.

‘진주는 ’감추어진 영혼‘이래. 책에서 봤어.’

“하지만 계란만한 진주는….”

본 적이 없다고. 말하려던 경염은 입을 다물었다. 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토록 넓은 땅 위 어딘가에 계란만한 진주가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경염은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다 줄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진짜? 약속한 거다?’

제게 스케치북을 내밀어 보이며 환히 웃는 임수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럼에도 보고 있던 경염의 가슴이 순간, 묵직하게 차올랐다. 이게…뭐지? 그때는 몰랐다. 그러나 알았다. 이제는 알아야만 했다.

아직 끝을 본 적 없는 소년의 세계는 무한할 뿐이라는 걸.

경염의 손이 임수의 얼굴을 붙들었다. 쫓기는 것처럼 다급하게 그의 입술을 찾았다. 입술이 맞물린 순간,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순진한 욕정이 모른 척 하던 눈을 떴다.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했던 무구한 순정이 어디서 용기를 빌어 왔는지 모를 일이다.


경염은 기꺼이 임수의 입술을 삼켰다. 말랑하다 못해 제 혀에서 녹을 것 같은 임수의 아랫입술을 살살 물고는 제 숨으로 촉촉이 적셨다. 눈을 감을 줄도 모르던 소년들의 시선이 제대로 마주쳤다. 그 순간 느낀 충동. 다시 파고든 혀가 살짝 벌어진 입술을 넘었을 때, 질끈 감은 두 눈과 동시에 경염은 그를 밀어 붙였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몸이 침대 위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수…, 수야.”

그 세계는 네가 웃을 때마다 점점 더 넓어지고, 찬란해 진다.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나는 목소리가 성인의 것처럼 낮고 습했다. 그러다가도 달뜬 열에 못 이겨 축축한 기운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신기하게도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혀가 녹았다. 녹아서 제 형태를 잃어버린 혀가 하얀 피부 위로 뭉그러지며 소년의 몸을 적셨다. 마르고, 다시 적시는 동안 체온은 쉬지 않고 올라갔다.


더워. 너무 더워서…그래. 경염은 그의 위에 올라탄 채로 제 웃통을 벗어제꼈다. 의지할 수 있는 빛이라곤 겨우 창문을 넘나드는 달빛이 고작이었다. 경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퍽 두려웠는지 긴장이 역력한 눈동자가 따라 젖었다.

“너…울리려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잦아드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밀어붙이던 그는 어디로 갔는지 금세 또 작아지는 모습은 경염답지 않았다. 이분법처럼 정확히 나뉘는 그의 세상에선 고민이나 망설임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항상 분명했다.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는 성정이었다.


그런 경염이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고민하는 건. 오로지 제 풋정 앞에서 뿐이었다. 경염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가 너를 울리다니. 네가 웃는 만큼 환해지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네가 웃지 않으면…모든 게 다 끝장이야.


어린 마음은 쉽게 초조해졌다. 울리고 싶지도 않았고 함부로 하고 싶지는 더더욱 않았다.



“……수야?”

얼굴을 감싸 쥐고 있던 손목을 따라 쥐는 손길에 경염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살며시 날아 온 손길이 나비가 되어 손목 위에 앉았다.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어느덧 세상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임수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빠짐없이 보고 있으면서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임수는 누구보다 강했다. 부딪쳐 보기도 전에 미리 질 수밖에 없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임수의 팔이 경염의 목을 끌어안을 때까지도.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차 느려지고, 그렇게 느려지다가 기어코 멈췄다. 임수의 입술이 제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초옥.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염의 손이 품에 안겨있던 임수의 어깨를 붙들었다. 마치 보물 상자를 열어볼 때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찬찬히 그를 제 품에서 떨어뜨렸다.

마주친 그는 여전히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러나 결코 빛을 꺼뜨리지 않겠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 이제 더는 달빛에 의존할 까닭이 없다.
경염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임수를 덮었다.









취한 것이다. 빛에 취한 밤이었다.


경염의 눈이 스르륵 열리며 새카만 천장을 응시했다. 어느덧 꺼져있는 등불에 방 안은 온통 칠한 듯이 어두웠다. 어차피 눈은 금세 어둠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외로움에도 익숙해진다. 홀로 남은 밤 같은 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제 더는 소년일 수 없는 남자에겐 외로움도 사치였다. 그보다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홀로 남은 밤에 문득, 너를 떠올리는 일.
아니면 더 이상 무한하지 않은 세상이 여전히 너무 크고 넓다는 걸 깨닫는다거나.

혹은 여전히 너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는 일.





남자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서방(書訪)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