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08








9일.

시간은 점점 더 촉박해진다. 누구도 함부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나날이다. 여유를 잃을수록 평정심을 잃기 쉬웠다. 당연한 소리. 경염은 물끄러미 좌중을 둘러봤다. 익숙한 얼굴부터 낯선 표정까지. 다채로운 참석자들이 떠드는 이야기들에 귀를 열어두고 그들의 소리를 빠짐없이 머릿속에 욱여 넣고 있는 중이었다. 이는 필요한 기억이다. 미리 준비해뒀던 생수로 목을 축인 경염은 등받이에 기대었던 등을 꼿꼿하게 폈다. 그는 한 순간도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고 배웠다.

“정왕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어째서? 경염은 속으로 되물었다.

“황실의 재건은 중국 역사에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경제가 자유로워졌습니다. 정치판 역시 민주주의를 향해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황실의 재건은 민주주의에 걸맞은 일인가? 경염은 속으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대들의 의견은 잘 알았소. 허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선황의 교지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다음 보위를 결정할지에 대한 의견이오. 정치판의 동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숙지해 주길 바라오.”

이 나라에서 정계에 뛰어든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물론 어느 나라든 정치판에 대한 위험 감수는 필수불가결한 의무이긴 했지만 중국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공산당이 90%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 어마어마한 땅덩어리와 인구, 무엇보다도 자유 경제 주의의 도입으로 아시아의 패권을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계는 여전한 실정이었다.


실제론 공산당이라는 황실과 주석이라는 황제가 판을 주도하는 형국이다. 기왕이 바랐던 것, 그리하여 경염이 그리던 그림은 정계의 힘을 세 갈래로 나누는 일이다. 이른바 삼권 분립. 서로를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기왕의 최종 목표였다. 경염의 손가락은 책상 위를 토독, 두드렸다. 제 편이라고 모인 이 자들 중에 이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는 이가 몇이나 될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정왕 전하…….”
“말하시오.”
“정말로, 전하의 소행이…아니십니까?”

좌중은 기다렸다는 듯 침묵했다. 즉슨, 이 질문은 모두가 묻고 싶었던, 그러나 차마 할 수 없었던 질문이라. 정왕은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이중에 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뉘 있으랴. 없을 것이다. 따라서 멍청한 질문을 던진 그를 굳이 나무라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사태에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현경사. 다음은 정왕부. 당연한 결과였다. 예왕이 황제에 오를 것이라 확신하는 이들이 과반수가 넘는다. 어찌됐든 기왕이 죽은 뒤로는 지금껏 예왕의 독주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아니라고 하면, 믿을 것이오?”

경염은 보기 드물게 웃었다. 웃지 않기로 정평이 난 사내의 미소는 모두에게 안도 이전에 불안함을 야기했다. 웃고 있는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경염의 손가락이 다시 토독, 책상 위를 두드렸다. 생각이 많을 때마다 일삼는 버릇이다.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는 손가락은 생각을 촉진시켰다. 정리 또한 수월했다. 경염은 또 한 번 설핏, 웃었다.

“이중에 진정으로 내가 황위에 오를 거라 믿는 이들이 있냔 말이오.”

불안함. 너무 당연한 감정이자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인 것을 탓하진 않겠다. 불만을 품지도 않겠다. 차라리 모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정왕 전하는 아니 될 것입니다. 하고 외치는 편이 속은 편했다.


사실이니까.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지만 망상은 클수록 저만 괴로운 법이다. 그 역시도 이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이들은 손에 꼽았다. 기본적인 신뢰를 주고받을 수 없는 마당에 그들에게 큰 기대를 거는 건 무리였다.

“아직…….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안 해 주셨습니다. 전하.”

그렇지. 나 또한 대답을 주지 않았지. 정왕의 손가락이 멈췄다.

“내가 한 짓이 아니오.”

이 이상의 대답이 필요하냐는 듯 경염의 시선이 다시 모두에게 향했다. 그들은 침묵했다. 화합되지 않은 무리의 결속력은 이다지도 보잘 것 없다. 매장소가 어떻게 그를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제 사람들은 아니었다. 경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들 역시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길 바라오.”




역시. 이번에도 침묵뿐이었다.









돌아가는 패를 읽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나 몰라라 던져놨을 때에는 남의 일이었지만 막상 그 판에 들어오면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 경염은 오랫동안 정치권의 행보에 주목해 왔다. 그들이 경염을 주시하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차이였다. 기왕이 죽은 이후로는 더더욱.


경염은 제일 먼저 흐름을 읽었다. 정치권에서 기왕을 환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밥그릇을 빼앗으려 들 때,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기민해지는 법이었다. 그만큼 기왕이 인정할만한 적이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허나 그것이 사람을 죽일 정도로 대단한 이유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다.


정말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을까. 잘은 몰라도 그것이 다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여태 경염을 사로잡고 있었다. 자신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민주당과의 회의를 마친 뒤 경염은 곧장 랑야관으로 향했다. 며칠만이더라. 연락은 없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매장소 역시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역시도 움직이는 상황을 파악 중인 것이라 어림짐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염은 그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저번의 일이 자꾸만 생각나는 통에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물론,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다.


손 안의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경염은 곧 생각을 접었다. 울리는 적이 없는 핸드폰을 쥐었다가, 또 폈다가. 괜히 한 번 들여다보고 내려놓는. 그런 짓을 하는 제 자신이 멍청해서 견딜 수 없었다.


왜? 물음표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였다. 그는 명분이 중요했고 항상 이유를 필요로 했다. 스스로가 납득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길이 옳은 길이든 틀린 길이든. 혹여 너무 옳아서 부러질 것 같은 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정의가 아닌, 스스로의 정의가 가장 중요한 남자가 자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오류였다. 그것이 때로는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되기도 했지만 고집불통이라는 점에서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은 랑야관이 바빠 보이는군요.”
“…그렇군. 무슨 날인가?”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즉위식이 가까워질수록 드나드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어차피 그놈이 다 그놈이겠죠.”

열의 말에 경염을 슬쩍 웃던 입가를 내려놓았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의 랑야관은 저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해졌다. 켜 둔 조명의 개수가 많았고, 흘러나오는 음악 역시 성대했다. 이 나라, 이 땅 위에 있었지만 그곳만은 여전히 별천지였다.


황제가 죽은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점을 감안하면 정녕 옳은 일인가 싶다가도, 이미 예법과 도의를 져 버린지는 오래였다. 당장 저만 보아도 부황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기리지 않는다. 좋은 기억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에야 겨우 제 어미를 돌아봤던 아버지에게 좋은 기억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들어가 볼 테니 무슨 일이 있거든 연락해.”
“대기할까요?”
“그래.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오늘은 물어봐야겠다. 민주당 의원들을 어떻게 제 편으로 만들었는지를. 경염은 확신했다. 매장소는 저에게 도움이 될 사내였다. 저를 알거나 믿는 문제와는 관계없이 없는 것 보단 있는 편이 나았다. 과반수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지녔다. 하지만 역시 그 주체가 될 제가 과정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경염은 안으로 들어서며 매장소와 나눠야 할 이야기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은 어떻게든 대화의 구실을 만들려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민주당 의원들과 회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라던가. 오늘 즈음에는 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를 보인 뒤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향후에는 어떤 대책이 있으며, 또 어떤 방도를 준비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래, 이쯤이면 대화를 나누기에는 부족함이 없겠지. 경염은 습관처럼 목을 가다듬었다. 한 손에 꽃이라도 들어야 구색이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작 경염, 본인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정왕 전하.”

낯선 여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번에 보았던 여인과는 다른 터라 경염의 눈가가 잠시 가늘어졌다. 어차피 이곳에서 제가 아는 사람이라곤 저번에 보았던 여인, 그리고 사내. 어린 경호원이 전부였다. 다만 여인이 풍기는 분위기가 남다른 탓에 탐탁지 않은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무엇보다도 차림이 달랐다. 랑야관의 식구들은 전부 예복을 차려입는 것이 이곳의 법도라고 하지 않았나.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은 검은 현대식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경염의 눈가가 슬쩍 기울어졌다.

“종주를 만나려 한다.”
“예, 종주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번에도 말인가. 이쯤 되면 정왕부 어딘가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 지를 의심해 봐야 할 판이었다. 매번 귀신같이 잘도 맞추는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그도 자신을 만날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마음의 부담이 덜어졌다. 저번에 있었던 ‘사고’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듯 했다. 비류라고 했던가…. 제 목에 칼까지 들이댔던 자에게 고마워 할 날이 올 줄이야.

“이쪽으로 오세요.”

여인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낯선 장소에서 만나는 이는 그가 누구든 한번쯤 의심해 볼 법 했다. 그럼에도 그는 순순히 여인의 뒤를 따랐다. 딱히 피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매장소를 만날 적에는 경호원도 동행하지 않았다. 랑야관 안에서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느냐 싶었다. 경염은 허리를 세우고 똑바르게 걸었다. 저번에 갔던 길과는 사뭇 달라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매장소는 어디 있는가?”
“아직 접견 중이십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허리를 숙인 여인은 곧 방을 빠져나갔다. 저번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희들이 없었다.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던 술상도 없었다.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이번에도 그런 쓸데없는 호의를 보였다간 정말로 화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염은 텅 빈 방 안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언제 보아도 신기할 따름이다. 요즘 시대에도 이런 건물이 남아있다니.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소리?



무슨 소리지. 경염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딱히 남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취미는 없었지만 서로 섞이는 말소리 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 화근이었다. 매장소다. 경염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겼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게다가 자세히 보니 벽이 아니라 문이었다. 소리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종주의 말대로 했소이다.
-그렇군요.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사옥은 늙은 늑대지. 내 의중을 떠보려는 수작이 눈에 훤히 보이더이다.

…매장소? 불안한 예감이 확신이 되는 순간. 경염의 눈에는 작은 구멍이 들어왔다. 그는 홀린 듯 구멍 위로 제 눈을 맞췄다.

-안부 차 왔다는데, 이 시국에 그럴 리가 있겠소. 겉으로는 내 편을 드는 척 하지만 그 늙은이야말로 나를 가장 내치고 싶어 하는 세력의 중심이 아닌가. 뿐만 아니지. 황족의 정치 세력 참여라면 치를 떠는 늙은이요. 그래서 내가 사옥에게 살짝 정왕을 언급하며 흘렸소이다.

심지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는 예왕이었다. 경염의 눈이 순간 커졌다.

-정왕이 아무래도 정치 참여에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야. 안 그래도 정왕은 죽은 기왕에게 배우고 자라지 않았소.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훗날 크게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하고 말했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 사옥은 예왕부 대신 정왕부를 견제할 것입니다.

뭐라고? 제 귀로 듣고 있지만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매장소와 예왕이 함께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격일진데 심지어 그 분위기는 사뭇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 장면만 보면 매장소는 예왕부의 책사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경염은 제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거야말로 환영할 이야기지. 어차피 공산당 쪽에는 정왕부의 사람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말이오.
-불호(不好)와 혐(嫌)은 엄연히 다르지요.
-암, 암! 그렇고말고. 당연한 얘기가 아니겠소. 교지를 찾지 못하더라도 정왕이 황위에 오르는 일만은 없을 것이니 이제야 나도 조금 마음이 놓이오.

이게 대체 무슨 대화란 말인가. 경염은 가만히 들여다보던 구멍에서 눈을 치웠다. 예왕과 매장소가 만나고 있다고? 랑야관이 아무리 정재계 인사들이 제 집처럼 드나드는 장소라고 한들, 그와 독대를 하는 것은 정왕으로선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중세작? 아니, 아니다. 너무 앞서나갈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를 다독이는 마음은 얄팍했지만 경염은 그에 걸었다. 그러기도 잠시, 생각은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기든 아니든, 매장소의 진심이 어디로 향해 있는 지는 본인이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에 하나 매장소에게 이 일을 두고 따져 묻거든, 또 그가 대답한다 해도. 자신은 그 대답을 믿을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생각들이 시끄러웠다. 인간은 호기심을 죽일 수 없는 동물이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이 일의 전모(全貌)를 알아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다만 뛰어대는 제 심장이 너무 힘찬 탓에 고막 안 까지 쿵쿵 울리는 박동이 시끄러웠다. 침착해야 한다. 경염의 손이 벽을 짚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내부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바짝 붙었다.

-역시, 천하제일의 기린재자라는 종주의 명성은 틀림이 없는 것 같소.
-아닙니다. 전하.
-어허, 너무 과한 겸손은 오히려 부덕함이오. 오늘은 내 기분이 좋으니 종주도 한 잔 받으시오.
-…저는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내가 주는 술도 말이오?

오가는 대화에 이미 물씬 물이 올라 있었다. 보고 있으려니 목구멍이 다 시큰거리는 것이 또 다시 열병이 오나 싶었다. 매장소에게 억지로 술잔을 쥐어준 예왕이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그 장면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는 경염의 심장이 돌연, 욱신거렸다. 얼굴에 다 드러나진 않더라도 낭패인 기색임이 확실했다.

-종주의 공이 커 내가 보답을 하고자 하니 앞으로는 내 성의를 거절하지 마시오.

예왕의 손길이 매장소의 무릎 근처를 맴돌았다. 올려 두는 것으로 모자라 그 주변을 슬슬 돌려 만지니 그 안에는 필히 다른 뜻이 있음이라. 이제 더 이상 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석상 마냥 굳은 몸이 뻣뻣해지는 것은 물론,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예왕이 그를 만진다. 한두 번이 아닌지 익숙해 보이는 손길에 식었던 피는 기다렸다는 듯 거꾸로 치솟았다. 알고 있었다. 그가 저런 방식으로 은밀한 이야기를 수중에 넣고 정보를 캐내는 것은. 허나 직접 눈으로 보고 듣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였다.

-이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전하.
-알았소.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소.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한낱 요정에서 머무는 모습은 주변에서도 보기 좋지 않을 것이니 차후에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이걸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종주에게도 큰 복이 내릴 것이오. …오늘은 이만 가보겠소.

이토록 끓어오르는 열을, 화를, 분노를.

예왕이 모습이 방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경염은 숨을 쉬어본다. 제가 제대로 호흡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지니게 되었으니 변명하지 못하는 분노도 아주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질 못했다.


문을 턱 짚은 손길과 동시에 경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제 가슴께에나 겨우 올 곳에다가 목구멍에 걸린 숨을 토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디에서는 열이 펄펄 끓었다.


그러다 비로소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허리는 다시 꼿꼿하게 섰고 자세 역시 똑바르기 그지없었다. 평소의 경염이었다.




문을, 열었다.




“……경염?”

저를 보자마자 당황하는 눈이 제 착각이라 믿고 싶었다.



“미리 말하겠소.”

하지만 아닐 것이다. 남자는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한 얼굴로 상대를 추궁했다.



“나는 이제부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할 것이오. 물론 도리에도 맞지 않은 일이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도리어 가라앉는다지. 올곧은 성정은 분노에도 취약했다. 살면서 화가 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슬퍼할 일 또한 많지 않았던 것처럼. 오죽하면 부황의 죽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그의 화를 샀던 일은 모두 슬픈 일이었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경염이 매장소의 앞에 섰다. 종주의 눈빛은 시종일관 흔들렸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경염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예왕과의 밀회를 내게 들켜서? 내가 듣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뻔히 떠오르는 보기들이 유치하기 그지없다. 허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음이라. 경염의 손이 매장소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예복과 수트를 입은 두 사람의 모습이 사뭇 상반되었다. 남자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분노가 곧 슬픔이었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슬퍼하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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