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12








지하는 어둡고 습했다. 같은 건물인데도 지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경염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쓰다 만 공사 자재들이 이리저리 널려있었고, 시멘트 부스러기에 주변의 공기는 온통 탁했다. 게다가 이 습기. 비가 오면 영락없이 샐 벽면에서는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외부만 그럴싸하게 인테리어를 해놓고선 내부, 특히 지하는 신경도 안 쓴 표가 역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 밑에서는 돌조각들이 부스러졌다. 그러다가 다시 벽으로 향한 시선은 아차, 싶다. 벽에 흐르는 자국은 물이 아닌 피였다.


삼합회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쓰레기장이다. 경염은 지하의 정체를 깨닫곤 찌푸렸던 미간을 풀었다.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깃들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불쾌함, 혹은 소름, 그리고 두려움, 결과적으로 분노….


종류가 무엇이든 감정을 허락한다는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곳이 비단 여기뿐일까. 경염은 새삼 자신이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를 깨달았다. 14K단. 산쥬. 그리고…삼합회.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저 자인가?”
“맞습니다. 잡는 데 애 좀 먹었습니다.”
“대가로 무엇을 바라시오?”
“글쎄요. 취미생활에 돈 받는 취미야말로 없어서.”

히죽 웃는 낯짝이 역겹다고 생각하면서도 경염은 드러내지 않았다. 애 좀 먹었다는 방금 전의 말과 상반되는 그의 취미생활을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일을 부탁한 것은 경염, 자신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찾기만 하면 되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든 잡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가소로운 동정이야말로 오만이다. 실제로, 경염은 벌써 수 차례 얻어맞았을 것이 분명한 저 사내가 하나도 가엽지 않았다. 만일 그의 얼굴과 몸이 상처투성이가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나섰을지도 모른다. 패고, 또 패서. 그러다 죽는다면 또 죽이고, 죽여서라도.




끝내, 죽여 버렸을 것이다.
저 사내가, 제게서 임수를 앗아갔다.




그러나 하지 않는 까닭은 이미 줘 터진 행색이 불쌍해서는 물론 아니었고, 그런다고 해서 죽은 연인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물론 소년이 살아있었더라면 제 손에 피를 묻히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살아 있었더라면 애시 당초 제 손에 피를 묻힐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는 공존할 수 없는 문제, 해결되지 않는 실마리였다.


경염이 사내를 죽이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유는 아직까지 그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불을 지른 것은 저 자일지 모르나 그 혼자서 그런 이를 벌렸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제 1황자의 사가이다. 이는 황실에 대한 위협이자 전면으로 황권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젠가는 공산당의 짓일 거라고 추측해 보기도 했으나 직접 정계에 뛰어들어 실상을 본 이후로는 생각을 고쳤다. 그들은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기왕이 죽고 난 뒤에 그의 사가에 불을 저질러봤자 그들에게 돌아가는 소득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분명 다른 배후가 있다. 남자는 진상을 알아야만 했다.



“안대 벗겨 봐.”

린신의 말에 사내의 곁에 서 있던 덩치 중 하나가 안대를 풀었다.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원래의 모습을 연상하기 어려웠다. 경염은 유심히 그를 살폈다.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읍, 으…읍, 읍…!”

사가에서 부리던 가솔들 중에 하나라더군요. 린신의 설명은 들었지만 경염은 딱히 그에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사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한 쪽 무릎을 굽힌 채로 입에 덕지덕지 테이프를 바른 그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경염이 가솔들의 얼굴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낯이 익다. 경염은 기어코 기억해냈다.

“……너로군.”

서재에서 임수를 위협하던 남자였다. 그날의 만남을 어찌 잊을까. 정확히는 그를 기억한다기 보다는 그날의 임수를 기억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이마에서 관자놀이, 뺨까지 이어진 상처를 보고 확신했다. 이 남자는 그다. 고로, 그가 진범일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물끄러미 사내를 응시하던 경염이 순간, 망설이지 않고 그의 입에 붙은 테이프를 홱 잡아 뜯었다. 짜악.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봉인되었던 사내의 입이 열렸다. 그는 일단 밀렸던 숨부터 몰아쉬었다.

“묻는 말에 대답을 제대로 못하면 너는 죽는다.”
“흐으, 흐, 흐으….”
“거짓말을 말해도, 물론 죽을 거고.”

경염은 일어서 그를 내려다봤다. 진실을 마주해야 할 순간이 왔다. 도대체 누가, 기왕의 저택에 불을 지르도록 조종했는가. 경염의 본능이 그 뒤에 분명 더 큰 진실이 도사리고 있음을 외치고 있었다. 잠시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살려…살려, 주십….”
“누구지? 너 혼자만의 소행은 아닐 것이다.”
“전, 전하! 정왕, 전, 하!”
“혀가 잘리면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테지.”

경염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저 손만 뻗었다. 그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린신이 내민 손을 보고 한숨을 푹 쉬더니 어깨를 으쓱거리곤 그의 손에 나이프를 올려두었다. 매장소가 알면 분명히 날 죽이려 들 테지. 린신은 경염이 그 나이프로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제발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로 남겨주기를 바랐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칼을 다루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낯설지도 않고. 손안에서 쉽게 방향을 바꾸는 칼놀림에 놀란 것은 오히려 린신이었다. 저런 재주가 다 있었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라고 했던가…. 그에 비해 경염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만약 5분 후까지 이런 기분이 지속된다면 정말로 사내의 목에 칼을 박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곤족! 곤족이, 잘못, 한 거야! 나는, 곤족이, 곤족이!”
“……….”
“그 빌어먹을 놈이, 내 마누라를, 홀려서!”

못 들어주겠군. 경염은 칼을 바로 쥐고는 순식간에 사내의 이마 정 가운데에 나이프를 가져다 댔다. 찌르진 않았지만 정확히, 닿아있었다. 거기서 조금만 힘을 주면 칼날이 피부를 짓이기고 들어갈 것이다. 물론 정말로 죽일 생각이라면 머리가 아닌 목을 노렸겠지만 뭐가 됐든 사내에게는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네 놈의 개인사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 지금부터는 쓸데없는 말을 해도, 죽는다.”
“그런데, 그 저택에, 있던, 꼬맹이도, 나를, 홀려, 홀려서….”

사내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경염 역시, 순간적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의 팔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힘껏 뻗어있었다. 커진 눈, 그대로 눈앞의 사내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야차(野次)를 연상시켰다. 말려야 한다. 가만 뒀다가는 정말 살인이라도 저지를 판이었다. 린신이 경염의 손목을 턱, 붙잡았다.

“히, 히이익…!”

네 놈이 지금 임수를 입에 올렸단 말이냐. 스스로조차도 몰랐던 분노가 경염의 머리를 삼키기 직전,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니야, 안 돼. 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살려둬야 할 가치가 있어. 경염은 제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서.

“히, 히히…. 말할, 말할 테니, 까, 용서…흐에헤, 헤, 용서해, 주십….”

인내심이 한계에 다 다르고 있었다. 이젠 정말 무리야. 이대로 가다간 제가 먼저 미치고야 말 것이다. 내쉬고 들이마시는 모든 숨이 뜨거워 기도를 다 녹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염산이라도 삼킨 양 오장육부를 형체도 없이 절절 끓게 만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진실을 열어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퍽 잔인한 일이었다. 머리가 저리고 손끝이 얼어붙었다. 덕분에 정말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손이 미끄러지거나 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말이지.



“으헤, 돈을, 주시면, 서, 불을, 지르, 헤헤, 헤!”

이제 거의 다 왔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췄다. 숨도 덩달아 멈췄다. 그리하여.




“…하, 하강, 어르신이! 그, 그자가, 나를! 다, 죽, 이려고…!”

경염은 순간 제 손에 쥐고 있던 나이프를 떨어뜨릴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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