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come true

연환계 (連環計) #아성명대


written by SEOBANG









아성에게 여자가 생겼다.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접한 것은 물론 명루였다. 간만에 모여 앉은 식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흘렸을 것이 분명한 한 마디의 희생양은 명대였다. 반찬으로 향하던 젓가락질이 문득 멈췄지만 그 장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명경조차도 아성이 여자를 만난다는 소식에 호들갑을 떠느라 그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누님이 신경 쓰실 정도의 사이는 아닙니다. 아성은 답지 않은 머쓱한 얼굴로 상황을 회피하려 했지만 명경의 집요한 질문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명대 또한 답지 않은 침묵으로 우두커니 식탁을 지켰다. 씹는 둥 마는 둥 하는 음식들을 내리 입 안으로 쑤셔 넣더니 다 삼키지도 않고선 들어가 보겠다며 일어섰다. 우물거리는 통에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는 발음은 입 안 가득 물고 있던 음식물들과 함께 목구멍 뒤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부재를 모르는 식탁에서는 여전히 아성의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분주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에게 자리를 빼앗긴 막내 도련님은 군말 없이 2층에 있는 제 방으로 향했다.



속에 삼킨 전부를 게워냈다.



한 차례 쏟아 낸 변기의 물을 내리곤 이빨을 닦는다. 우중충한 얼굴의 남자가 저를 바라보고 서 있다. 아무리 닦아내도 가시지 않는 찝찝함에 벌써 세 번째 치약을 짰다. 캭, 퉤. 뱉어내고 또 뱉어낸다. 헹구고 또 헹군다. 명대는 네 번째 치약을 짜다가 울렁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또 다시 변기통을 붙들었다. 나 좀 보라고. 욕실 문까지 활짝 열고 그 난리법석을 피우는 데도 들여다보는 이 하나 없다. 이제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 속이 두 번째 위액을 짠다. 신물 나. 정말 신물이 난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명대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흰 자위까지 시뻘개 진 남자가 거기 있다.

몇 날 며칠을 울었어도 이토록 비참한 몰골은 아닐 거라고.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남자가 거기 있다. 그가 꼴 보기 싫어서 눈을 감았다. 그러면 남자도 눈을 감는다. 명대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성에게/여자가/생겼다. 알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그의 남녀상열지사는 당황스러웠고, 솔직히 말하자면 역겨웠다. 명대는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삼 일 전의 키스를. 늦은 새벽 자장가를 대신하던 애욕을. 그리고 이제는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섹스를. 그러나, 섹스를.



키스는 셀 수조차 없기에.

하지만 무효가 될 수는 없기에.



명대는 다시 변기통으로 달려갔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그의 질문은 합당했다. 당위성은 물론이거니와 정당성을 갖추고 있어 직설적이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방문이 열릴 때부터 이미 명대이리라 짐작한 아성은 눈만 흘끗 들었다가 다시 들춰보던 서류에 집중했다. 명백한 무시였다. 아성의 무시에는 당위성은커녕 정당성조차 없었기에 명대의 화를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성큼성큼 걸어 간 두 다리가 책상 바로 앞에 설 때까지도. 아성의 반응은 전무했고 덕분에 명대의 인내심은 전멸했다. 쾅. 손바닥이 내려 친 책상이 크게 울었다.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이럴 거야?”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거냐. 명대.”

“왜 나한테 말 안 했느냐고 묻고 있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서 이래?”


그렇다면 기만이다. 기만은 용서할 수 없다. 기만은 있어서는 안 되는 죄이며 성립될 수 없는 공식이다. 특히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용납할 수 없다. 때마침 오작동을 일으키는 눈꺼풀은 깜박거릴 본분도 잊은 채 아성을 노려봤다. 집요하고 무섭다. 세상만사를 속속들이 알고 싶어 하는 척 해도 제가 애착하는 것들 외에는 냉담하기 짝이 없는 작은 도련님의 집착이야 아성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 애착의 순위들 중 적어도 세 손가락 안에는 제가 들어갈 거란 사실까지도.


“내 사생활까지 너에게 일일이 보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제야.”


되묻는 말에 명대는 그만 기가 막힌다. 따지고 보면 문제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꺼내기에는 하나같이 부족한 것들뿐이다. 어설픈 단어들이 주춤주춤 연결 된 문장에는 허점이 많았다. 아성은 그 점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자존심 또한 걸림돌 중 하나였다. 형과 내가 그동안 해왔던 것들이 연애 유사 행위가 아니면 대체 뭐였냐고.


물을 용기가 없어서 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뻔뻔하게 굴라치면 낯짝 위로 철판을 서너 겹 깔아도 하나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바로 명대다. 그럼에도 문장은 여전히 어설프기만 하고 이런 말들은 차마 아성의 앞에 꺼내놓을 수가 없다.


“…만나는 여자가 누군데? 나도 알고나 있자.”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아성 형!”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이성이나 논리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무엇을 위해 참았는지 그 의미 또한 퇴색된다. 울고, 불고, 떼를 쓰고. 그런 일이라면 어렸을 적부터 전매특허였다. 특히 눈물을 보일 때에는 그 누구도 명대를 거스르지 못했다. 여태껏 누님이 만들어 놓은 꽃길만 걸었다. 가끔씩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걱정 없었다. 그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개는 그 역할을 아성이 도맡았다.


“형이 나한테 했던 짓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런데 어떻게 형이 그래.

“……말은 정확히 해야지. 명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낯설다. 거기에, 모르는 남자가 있다. 명대는 문득 겁을 집어 먹은 아이처럼 미리 숨을 멈춘다. 아성에 관한 일이라면 기민하게 반응하는 본능은 이미 알고 있다. 그는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잠들기 전이라면 결코 들어서는 안 될 만큼 무서운 이야기를. 명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우리가 ‘같이’ 한 일이고.”


제발.


“이젠 다 지난 일이다.”


나를 기만하지 말아. 형.


앞으로 펼쳐질 숱한 불면의 밤이 별처럼 셀 수 없다. 명대는 그의 말이 거절임을 안다. 지난 과거에 대한 부정이자, 일어날지도 모르는 모든 미래에 대한 의사이며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마저 미리 거절한 잔혹한 처우다. 발밑의 땅이 드글드글 갈라졌다. 곧 와르르 무너진다. 명대는 눈을 감았다. 돌아서야만 했다. 저기 있는, 낯선 남자로부터.


“……미나미다.”


그를 붙잡은 건 사소한 이름 하나. 그러나 결코 사소할 수 없는.


“뭐……?”


“만나는 사람. 미나미다라고.”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쐐기를 별스럽게도 박는다. 그의 대답에 명대는 그저 웃었다. 아성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놀랍게도 그를 웃게 만들었다. 일그러진 입 꼬리가 실룩거리고 드러나지 않은 잇몸이 춤을 춘다. 뭐라고 그랬어, 형? 묻고 싶은 질문이 입술의 속살을 벅벅 긁는다. 그러나 묻지 않을 것이다. 미쳤구나, 형. 비난하지도 않는다. 느물느물한 이물질이 이 사이에 촘촘히 꼈다. 토하고 싶어. 아성의 한 마디가 오장육부를 쥐락펴락 한다. 정말 끔찍한 일이지.


“……진심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람에게 무엇이든 되고 싶다는 건.







아성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비겁한 침묵을 비난하기에는 명대는 충분히 지쳐 있었다. 그 순간이 아니면 확인할 수 없었던 진실은 뒤안길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명대는 손의 감각만으로 총을 조립했다. 나사가 단단히 빠진 멍청한 눈빛이 벽 모서리 구석을 더듬거리는 동안 그의 손은 빠르게 총을 완성했다. 기계 같은 손놀림이기에 오히려 얼이 빠져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넋은 어디 두고 왔느냐고 물으려던 곽 기운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명대는 벌써 3자루 째 총을 쥐었다.


“대장.”

“……….”

“대장!”


그러나 그들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며칠 째 저 모양인 명대를 지켜보는 것도 고역이라면 고역이었다. 명대의 눈길이 그제야 그들에게로 슬그머니 향했다. 뿌옇게 흐린 곽 기운의 뒤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만려의 눈과 마주쳤을 때야 정신이 돌아왔다. 화들짝. 놀란 동공이 깨어나는 모습이 적나라할 정도로 무방비했다. 장담컨대, 지금의 명대라면 한 손으로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진 않을 것이다. 대신 기운은 그를 타박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가.


“작전 회의를 해야 합니다. 정신 차리세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럽니까? 집안에 일이라도 생겼어요?”


의외로 눈치가 좋은데? 명대는 삼 일만에 처음으로 웃었다. 픽 하고 내빼는 헛바람 같은 웃음은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전에도 말씀드렸죠. 일본 영사관으로 직접 투입해야 합니다. 명령이 내려왔어요.”

“자세하게 말해 봐.”

“2층에 폭발물을 설치할 겁니다. 정해진 시간에 폭발물을 터뜨리면 다들 그곳으로 몰린 사이 주요 인물을 암살하고 탈출하라는 것이 상부의 지시입니다.”


이젠 대놓고 죽으라고 하는군. 말이야 쉬웠지만 극히 고난이도의 작전이었다. 병력을 요청해 달라는 전보에는 감감무소식이면서 역으로 명령을 내릴 때에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명대는 들고 있던 총을 테이블 위로 조용히 올려놨다.


“날짜는?”

“내일입니다.”


빠듯하네. 명대는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폭발물 설치에 암살이라니. 아무래도 군통 상부에서는 저희들을 불사신 즈음으로 여기는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도 그간 죽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이런 식이라면 당장 내일 죽어도 할 말이 없다.


명대는 팔을 넓게 벌려 테이블 모서리를 쥐고 섰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컨디션이 엉망이다. 이러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는 걸. 고작 3일 만에 명대는 썩 비관적인 인간이 되어 있었다. 죽어도 어쩔 수 없다라…. 자조적. 오랜만에 뇌리를 맴도는 단어가 명대의 문장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바로 보이는 총을 집어 들고 총신을 잡아 당겼다. 덜컥. 걸리는 끝에 긴장하는 건 나머지의 몫이다.


“암살 대상은?”


조금은 막 살아도 상관없겠지. 물론 죽을 생각은 없어. 걱정 마.




“특무과의 미다미다입니다.”



걱정 마.

죽여줄게.



확실히.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이런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나요?’

그는 답했다. ‘달라지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움켜쥐었다. 완력으로는 남자를 이길 수 없었다. 유독 흰자위가 많은 눈이 불만으로 일그러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언제든지 그녀의 허리춤에 달린 총이 자신에게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그녀의 총은 남자의 총보다 강할 수 없다. 그 또한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었다. 얇은 옷 껍질만 벗겨내면 속 알맹이는 그저 남자와 여자. 그뿐이었다. 남자의 총은 그때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성은 움켜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그의 다정함은 치밀하기 때문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바로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응당 입을 맞췄다. 고결을 상징하는 손등 위의 키스를 마다할 여자는 없다. 상대가 아성이라면 더더욱. 그녀는 얼굴을 붉힌다던가 하는 풋내 나는 반응을 보이기엔 이미 충분히 농익은, 무엇보다도 의심이 많은 여자였다.


“나는 당신을 믿지 않아요.”

“믿어달라고 한 적 없을 텐데요.”

“……….”

“설마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이 그저 신뢰만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속살거리는 낮은 목소리에는 농밀함이 숨어있었다. 의도는 적나라했으나 방식은 은밀했다. 아성의 팔이 미나미다의 허리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놀란 눈에 아성은 웃었다. 그는 확신했다. 넘어뜨리고자 한다면 넘어갈 것이다. 그녀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장소 또한 상관없었다. 침대 위가 되었든, 혹은 책상 위가 되었든.


“…원하는 게 뭐죠?”

“말하면 줄 겁니까?”


쓰러지는 몸 위로 겹치는 무게를 밀어낼 수 없다.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버린 이상 반전의 미학은 오늘 밤, 통용되지 않는다. 아성의 시선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자는 기민하게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작용을 읽는다. 찰나의 불꽃. 그녀가 그의 눈에서 정염을 읽어내려고 하는 순간, 이미 승패는 정해졌다. 아성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풀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아쉬운 사람이 찾아야겠죠. 다만 확실한 건.”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위로 그녀를 눕힌다. 안성맞춤의 자리를 찾은 아성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손이 아닌 입술이 가까워지는 동안, 거짓말처럼 풀린 것은 비단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위태로운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아성은 확신했다.



“오늘의 키스는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을 겁니다.”







오늘을 위한 준비는 철저히, 그리고 차곡차곡 이루어졌다. 명대는 묵직한 품 안의 무게를 가늠하며 기둥 뒤에 섰다. 늘 하던 대로 여유롭게 파티를 즐길 여력은 없었다. 의심을 사지 않고 인파들 사이에 섞이기 위해서는 고도의 훈련이 필요했다.


명대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이 유난히 긴장되는 까닭은 위험 부담이 큰 작전이라는 것도, 어쩌면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도. 아니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언제나 스스로였다.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정말로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명대는 확신할 수 없었다.


2층에는 곽 기운과 만려가 있었다. 폭탄을 터뜨리자마자 그들은 이곳을 빠져 나갈 것이다. 탈출로는 확보해 뒀으니 두 사람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하는 부담은 줄었다. 명대는 암살을 자청했다.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명대는 초조한 심정으로 손목시계를 훑었다. 이제 15초 후면 폭발이 일어날 것이고 파티는 엉망이 될 것이다. 일본군의 병력이 그쪽으로 몰린 사이 미나미다를 총살한다. 계획만큼 간단하지 않은 문제였다. 죽이는 일 보다도 죽이고 난 뒤가 문제다. 탈출하지 못할 거라면 붙잡히지도 말아야 했다. 명대는 마지막 심호흡을 삼켰다. 이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꺄악!!!”


정확한 시간에 터지는 폭탄과 함께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암살자는 기둥 뒤에서 적시를 노리고 있었다. 한 번에, 그리고 빠르게. 명대는 총을 꺼냄과 동시에 미나미다를 조준했다. 지금까지의 고민에 비해 행동은 명쾌했다. 그의 모든 신경이 표적을 향해 쏠렸다. 명대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빗나갔다.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미나미다를 밀쳤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명대가 당황하는 사이 미나미다를 밀치고 조준 반경으로 들어온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명대는 순간 쥐고 있던 총을 놓칠 뻔 했다. 아성이었다.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확히는 그의 입모양이 말했다.


‘쏴.’


그들의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명대는 총자루를 바로 쥐었다. 죽여 달라는 뜻이었을까? 아성을 죽이고 싶었던 적도 분명 있었다.


고민할 시간이 없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고, 총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명대는 아성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내 손에 죽는 게 소원이야 형? 묻지 못했다. 물을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소원대로 해 줄게. 말하지 못했다. 그 역시도 들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타앙. 총성과 함께 총알이 아성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또 다시 도처에서 터지는 비명과 함께 아성의 몸이 기울었다. 그럼에도 그는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순식간에 미나미다의 허리춤에서 총을 꺼낸 아성이 달려 나가는 명대의 뒷모습 뒤로 총을 쏴댔다.


이게 현실인가? 아닌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성의 총알은 명대의 앞을 가로 막고 있던 군인들의 다리 혹은 배. 또는 어깨나 머리 등. 사정없이 관통했다. 명중이라면 명중이었고 헛발이라면 헛발이었다. 총을 난사하던 아성은 결국 쓰러졌다.



“저 놈을 쫓아가! 그리고 의사를 불러! 당장!”


미나미다의 외침만이 연회장을 떠나가라 울려 퍼졌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아성은 생각했다. ‘다행히 살았군.’


그의 감상은 진부하고 뻔했다. 무엇보다도 담담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어쨌거나 살았다. 살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곧 명대가 자신을 살려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성은 심호흡과 함께 다시 눈을 감았다.


거의 동시에 병실의 문이 열렸다. 미나미다였다. 그녀를 보고 몸을 일으키려는 아성을 미나미다는 소리 없이 눕혔다. 자신을 대신해 총까지 맞은 남자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괜찮으니까 누워있어요.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퍽 다정하다. 아성은 통증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통증의 대가는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항일 분자의 소행이에요. 치밀하게 짜여 진 작전이죠. 더군다나 이번에는 나를 노린 것 같군요. 놈들의 수법이 점점 대담해지고 있어요.”

“잡았습니까?”

“…아니요. 폭발물 때문에 그쪽으로 병력이 빠져나간 터라 놓치고 말았어요.”


‘다행히 너도 살았군.’ 아성은 안도했다.


“그런데 어떻게….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그 부분을 확인해 봤는데 배부한 초대장에서 몇 장의 행방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더군요. 그런데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초대장들이 전부….”

“76호에서 발견되었습니까?”


아성의 질문에 미나미다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죠? 맞아요. 사라진 초대장들은 전부 76호에게 배부한 초대장 중에서 발견됐어요. 양 처장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처벌을 요구했고, 왕 처장은 그럴 리 없다며 재조사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왕 만춘을 조심하세요.”


아성은 단도직입적으로 카드를 꺼냈다. 미나미다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사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왕 만춘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 조심하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죠?”

“아무래도 왕 만춘이 우리의 관계를 눈치챈 것 같습니다. 왕 만춘은 평소에도 당신을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정확히는…당신의 자리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는 차에, 다시 병실 문이 열렸다. 명루였다.


“이 얘긴 다음에 다시 나누도록 하죠.”


미나미다는 명루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빠르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비밀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성이 보란 듯 한숨을 쉬었다. 명루는 방금까지 미나미다가 앉아있던 의자를 끌어 당겨 앉고는 아성을 지그시 바라봤다.


“내 생각보다 비위가 좋은 것 같구나.”

“그래서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까?”


‘미나미다를 유혹할 것.’ 처음 명령을 들었을 때에 아성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는 표정으로 명루를 노려봤다. 이젠 별 걸 다 시키는 군요. 엄연히 작전에 필요한 명령이었고 그로 인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성은 집을 나갔을 것이다.


“어쨌든 제대로 속인 것 같으니 그걸로 됐다.”


그걸로 됐다고요? 아성은 순간 울컥했지만 굳이 명루와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은 그럴 힘도 없었다. 명대가 구멍을 내 놓은 어깨가 끊임없이 욱신거렸다.


“명대는 그날 총살을 당한 일본군과 함께 밖으로 빼냈다. 이번에도 여숙을 보냈고. 일본군과 옷을 바꿔 입는 과정에서 명대가 금운에게 한 대 맞은 것 말고는 무사하다고 하더구나. 물론 실제로도 무사하고.”

“……그렇군요. 어떻게 될지 몰라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아성. 미나미다는 그렇다 치고…. 명대는 어떻게 한 거냐?”


이번 작전의 핵심은 명대에게 달려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명대의 첫 발에 아성이 맞았어야 했다. 하지만 빗나갔고, 그가 쏜 총에 의해 아성이 맞아야만 미나미다의 신뢰를 완벽히 살 수 있었기 때문에 한 시가 급박한 순간이었다. 아성이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쏘라고 한 건 분명 저였다. 그러나 명대가 그를 향해 총을 쏠 수 있었을 지는 저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헛바람 켜듯 픽 웃었다.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던 건 맞지만, 아성은 명대가 방아쇠를 당길 거라 확신했었다. 그는 눈을 감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자식이 평소에 절 죽이고 싶었나 보죠.”








아성이 퇴원하기로 한 날은 공교롭게도 명경이 홍콩으로 떠난 날과 같았다. 며칠 간 쉬어도 좋다는 명루의 명령으로 바로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문을 열 때부터 어쩐지 스산한 기운이 돈다. 집은 썩 안전한 장소가 되지 못하리란 예감으로 뒷목이 서늘했다. 호들갑을 떨며 아성의 가방을 건네받는 아향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를 마중 나오지 않았다.


“명대는?”

“아! 작은 도련님은 방에 계실 텐데. 불러 드릴까요?”

“아니.”


차라리 외출이라도 했기를 바랐건만, 아성은 곤란한 표정으로 계단을 올랐다. 당분간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냥 병원에 있겠다고 할 걸 그랬나. 이 부분에 관해서만큼은 명루에게도 상의를 할 수도 없었으니 아성 혼자 감당하는 수밖엔 없었다. 일단 한숨 자는 게 좋겠다. 설마 녀석이 자는 환자를 깨워다가 괴롭히진 않겠지.


“어서와, 형.”


애초에 자지 못하게 하면 모를까.


방에 있다는 것이 그의 방이 아닌 아성의 방이었나 보다. 아성은 제 침대 위에 떡하니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는 명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명대가 조용히 넘어갈 확률은 지극히 제로에 가까웠다. 아성은 걸치다시피 한 코트를 벗고 의자에 앉았다. 명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열 받으면 환자고 뭐고 들이박을 놈이니까.


“나한테 할 말 있으면 해도 좋아. 기회를 주지.”

“…없다면?”

“그럼 그때 머리통이 아닌 어깨를 날려버린 나를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지?”


뭐, 어차피 형이랑은 상관없으려나?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명대의 뒷말에 아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아성에게도 사정이나 입장이 존재했다. 전부를 말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미리부터 듣지 않겠다는 태도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애초부터 명대에게 교양이나 배려, 매너 따위를 기대한 적도 없지만은.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이네. 형이 매국노가 아니란 건 알았으니까 말이야.”

“명대야.”

“미나미다와의 관계도 거짓말이겠지? 당연히 그래야지. 나랑 비볐던 입술로 그 여자랑 비볐다고 말하진 않을 거야.”


그렇지? 명대의 질문에 아성은 침묵으로 답했다. 명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뿐만 아니라 벌떡 일어서 아성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성은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고, 따라서 얌전히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 사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명대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아성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니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어디까지 했어?”

“나의 작은 도련님.”

“개수작 말고, 대답.”


명대의 손이 다정하게도 아성의 멱살을 꽈악, 그러쥐었다. 덕분에 어깨의 통증이 심해졌지만 아성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통증의 대가가 원만한 해결이길 바랄뿐이다. 지금으로선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내가 무슨 심정이었는 줄 알아?”

“……….”

“나를 속였어? 형이? 형이 나한테 한 건 기만이야. 알아?”


부정당했다. 거절당했고, 결과적으로 상처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야 하겠지만 흉이 질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역류하는 위산에 감정이 다 긁혔다. 다 게워내고도 자꾸만 헛구역질이 나와 잠들 수도 없었다. 나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언젠가 닥칠 지도 모르는 최악의 결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절절히 체감했다. 그건 실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죽고 싶었고, 죽이고 싶었다. 그 여자를, 형을, 나를.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해.”

“용서해 줄 생각도 없거든?”

“하지만 용서하게 되겠지.”


그럼에도 죽지 못하고 살아서, 이렇게 살아서.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것인지를 우리는 아니까. 아성은 멱살을 쥐고 있던 명대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커다란 손에 잡힌 두 손은 떨고 있었다. 아성은 천천히 그의 손을 떼어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말해줄 수 없다.”

“……….”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지.”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이 하나, 하나 쌓이다 보면 언젠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높은 장벽을 이루게 되는 날도 오겠지. 그걸 알면서도 선택한 길이다. 걷는 걸음마다 발밑의 땅이 부서지는 것을 알면서도 전진 밖에는 답이 없는 길이다. 아성은 명대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부서질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보듬는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펜이 아닌 총에 익숙해진 그의 손이 가엽고도 안타까워서.


“나의 작은 도련님.”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동행할 수는 없는 둘의 결말은 여전히 미 완결로 남아 있었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기에, 확답 또한 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인인 적 없었다. 그러니 낯간지러운 밀어를 속삭일 수도 없었다. 명대가 늘 안달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아성이 언제나 안타까워하던 부분도 그 때문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 질문도 마찬가지다. 아성은 여전히 그에게 어떤 말도,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모든 게 끝나면, 함께 파리로 가자.”




변함없는 애정을 맹세하는 손등 위의 키스를 마다할 도련님은 없다.

상대가 아성이라면 더더욱.







/@SEOBANG


위장자 36계 합작에 참여했던 'paris come true' 입니다. 나름 귀여운 말장난이라고 생각했는데 안, 안 귀여우시다면... ( ._.)


합작 열어주신 제어판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좋은 소재로 글을 쓸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물론 약간 괴로웠지만...) 


다들 성대한 하루 되세요:)



ps


드디어 써봤다...나의 작은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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