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이미지는 색 합작 홈페이지(http://meichangsu-right.tistory.com/category❀)에서 개인 부분의 '적자색' 링크 이미지를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합작을 열어주신 연님과 편집에 함께 해 주신 내내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위의 이미지는 색 합작 홈페이지(http://meichangsu-right.tistory.com/category❀)에서 개인 부분의 '적자색' 링크 이미지를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합작을 열어주신 연님과 편집에 함께 해 주신 내내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봄은 눈이 녹고야 드러나는 계절이다. 


언제 올는지 몰라 마당 앞까지 나가 서성거려도, 겨울 내내 황량하던 가지에 싹이 돋기만을 기다려도.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몰래 숨어 있다가 어느 샌가 녹은 눈 아래로 움크리고 있던 고개만 살짝 들어 이제와 저가 왔노라. 알리는 계절이다.


황궁의 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이른 때였다. 화원을 거닐어도 보이는 거라곤 이제 막 녹은 눈에 젖은 가지들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 고작이었다. 황제는 며칠 내내 꿈자리가 숭하여 영 기분이 이상했다.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는 줄도 모른다는 황제인데 요새 들어 내리 꾼 꿈 때문인지도 몰랐다. 야트막하게 선잠에 빠진 황제는 어김없이 꿈을 꾸었다.


꿈에는 황룡(黃龍)이 나왔다. 산등성이 사이로 구불치던 용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몸뚱이는 산 하나를 전부 휘감고도 꼬리가 남았고, 수염은 세상에서 제일 긴 연처럼 팔락거렸다. 무시무시한 발톱 사이로 여의주를 움켜쥔 황룡은 황제의 앞까지 날아와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등 뒤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돌아보면 용은 황궁의 담벼락을 휙 넘어 사라졌다.


연일 같은 꿈을 꾸다보니 이제는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라 황제는 용을 쫓기 시작했다. 용은 무섭지 않고 다만 경이로웠다. 허나 달려가 보면 용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황제는 용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쉬워 꿈에서도 황궁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러다가 어제야 비로소 용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알았다. 용은 매양궁(梅洋宮)의 처마 밑으로 들어가선 그 길로 자취를 감췄다. 커다란 몸집을 어디다가 숨겼는지는 모를 일이나 용이 사라지고 난 뒤, 매양궁 전체가 황금빛으로 번쩍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는 그의 후(后)가 회임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이듬해보다 더디게 찾아온 황궁의 봄이었다.








어여쁘다.


적자색(赤紫色)

作 SEOBANG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궁이라지만 최근에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가장 소란스러운 곳이라면 역시 매양궁이었다. 환관이나 궁녀, 너나 할 것 없이 재잘거리며 궁 안을 바쁘게 누볐다. 제 주인이 회임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통 회임이 아니다. 아무리 음인(陰人)이라 해도 황후는 사내였다.


자고로 음인 사내란 몸 안에 씨방이 넓지 않고 회임을 할 가능성도 계집에 비해선 한참 떨어졌다. 벌써 혼례를 올린 지 3년이 지났는데도 둘 사이에서는 이렇다 할 기미가 없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금슬로 치자면 대량에서 으뜸가는 황제 내외였지만 후손을 보지 못해 마음 졸이던 나날들. 하여 어질고 자애로운 황후는 지존에게 새로운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하라며 몇 번이고 간청을 드렸건만, 황제의 고집 역시 만만찮은 터라 그는 들어도 아니 들은 척 후의 청을 거절했다.


“내가 꾸었던 꿈이 태몽(胎夢)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소. 어쩐지, 예사로운 꿈은 아니다 싶었지. 커다란 황룡의 몸에서 온통 빛이 번쩍번쩍 거리는데……. 황후, 내 말 듣고 있소?”


경염은 넌지시 그를 불러보았지만 이미 이불과 한 덩어리가 된 그의 후는 잠에라도 든 모양인지 답이 없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어 있었는데. 난데없이 이불을 더럭 뒤집어쓰더니 제게 등을 돌리고 누운 그의 행동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런 반응이 익숙지 않은 경염이 애써 몇 마디 덧붙여 보았으나 그는 반응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후?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이오. 혹시 몸이 좋지 않은 것이라면.”


이불은 말이 없었다.


“샤오수. 왜 그러느냐.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게야? 그렇다면 당장 어의를 불러…….”


경염은 누군가를 달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달래기는커녕 이유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난데없이 등을 돌리고 누운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 안절부절이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멋대로 결론을 내린 경염이 어의를 부르기 위해 일어서려 할 때였다.


“어찌 할 테냐.”


이불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보료를 벌컥 젖힌 황후가 드디어 반응을 했다. 그러나 첫 마디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경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커다란 눈만 꿈벅거렸다.


“내가 회임을 했다, 경염. 회임을 했단 말이다.”

“……샤오수?”

“허. 정말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구나.”


기가 막힌 듯 한숨을 터뜨리는 황후, 매장소의 반응은 전혀 예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인지라 경염은 여전히 눈만 꿈벅거렸다. 황후에 봉해진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말을 낮춘 적 없는 그였다. 이따금씩 황제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침상에서의 은밀한 유희일 뿐. 그 외에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던 그의 입에서 느닷없이 예전 같은 목소리가 나오니 경염은 못내 당황했다.


“양인에서 음인이 된 것만으로도 놀라웠는데, 기어코 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 끝에는 탄식이 묻어났다. 15년 전, 매령 계곡에서 죽다 살아난 이후로 임수는 매장소가, 양인은 음인이 되었다. 빙속초의 효험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영험함인지라 3개월도 채 살지 못할 거라는 그가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일 진데. 그는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 준 벗이자 연인, 이제는 정인이 된 경염을 위하여 마음을 굳혀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수아야. 갑자기 회임을 하여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라면…….”

“놓아라. 경염.”

“……샤오수?”


나라는 태평하고, 죽을 줄로만 알았던 연인은 돌아와 평생을 약속한 정인이 되었다. 이제는 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고비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경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나가다오. 혼자 있고 싶구나.”


세상을 다 잃은 것 마냥 크게, 흔들렸다. 경염은 결국 자리를 보전치 못하고 매양궁 밖으로 쫓겨나듯 빠져나왔다.







하루가 지나면 풀리겠지 싶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가라앉을 줄로만 알았다. 아무리 못해도 한 달을 가진 않겠지. 생각은 번번이 틀렸다. 벌써 3개월 째. 하루아침에 바뀐 황후의 태도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문제될 것이 있느냐 하면은 그것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선 그는 어디까지나 매장소, 매(梅)황후였다. 그러다가도 둘만 남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는 임수였다.


그 간극은 제 아무리 황제라 해도 감당키 어려웠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을 뿐더러 저 역시도 그를 어린 날의 벗처럼 대하기엔 상대는 홀몸이 아니었다. 노심초사. 애지중지. 혹여나 여전히 약한 몸이 어디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경염은 내내 마음을 졸이며 그를 도자기처럼 다뤘다.


“그게 다 회임증후군 아니겠습니까.”


황후의 몸을 살피기 위해 오랜만에 금릉으로 돌아 온 랑야각주는 무심하게 툭 던지고 말 뿐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증세에 경염은 눈을 크게 키우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회임을 하게 되면 여러 증세가 나타나지요. 생전 입에 대지도 않던 것이 먹고 싶어진다든지, 아니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든지. 증세야 여러 가지겠지만……황후마마의 경우에는.”

“뜸 들이지 말고 말해보시오.”

“거 참, 폐하. 생각을 좀 해보십시오. 이제 그는 더 이상 매장소로 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폐하를 위해 금릉에 남기로 했지요. 아무리 음인이 되었다 한들 과거의 양인이었던 사내입니다. 그뿐입니까. 사내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무리들도 적잖았을 텐데, 지난 2년 동안 황후마마의 속이 어땠을까, 이 말입니다.”


듣다 보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우습게도 이때까지 경염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기도 없다. 그저 연인의 선택과 결정에 고맙고, 고마울 뿐. 그에게 세상을 다 주겠노라 는 고백으로도 미치지 못할 마음이 있었다. 이를 테면 차마 어루만지지 못했던 그늘이 말이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애석하게도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폐하. 그저 장소, …아니 황후마마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해드리는 수밖에요. 먹고 싶은 것이 있다 하면 먹여 주시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면 그리 하게 해 주십시오. 감정과 기분을 다스리는 일이 곧 마음을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해야 복중의 귀한 태아에게도 좋은 영향이 미치겠지요.”


이 역시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경염은 세상 제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소, 내 꼭 그리 하리다.”







그리고 정확히 이주일 만에 경염은 자신의 다짐을 후회하기에 이른다.


“꺼져.”


…수아야? 떨리는 목소리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한 손엔 귤을,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서책을 넘기며 경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입만 오물거릴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꺼지라니. 경염은 자못 상처받은 눈으로 매장소를 바라봤지만 그는 여전히 경염은 있어도 없는 듯, 없으면 더욱 좋을 듯 굴었다. 모로 보나 예전, 저에게 화가 났을 때의 임수였다.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다. 경염.”

“…샤오수, 어찌 그리 말을 할 수 있느냐.”

“중요한 부분을 읽고 있다 하지 않았어.”


목소리가 냉랭하기 그지없다. 비단 목소리만 냉랭하더냐. 표정은 얼음판처럼 싸늘하다. 야속한 정인은 비스듬히 누워 여전히 한 손으로는 귤을 까먹으며, 또 다른 손으로는 서책을 넘기며 홀로 무릉도원에 살고 있었다. 이제는 경염이 와도 일어날 생각을 않는 그이는 분명 매장소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속알맹이는 임수였다. 경염은 요즈음의 매장소를 볼 때마다 자꾸 과거의 벗이 생각나 반갑고도 심란했다.


“어찌 이래.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해다오, 샤오수.”

“잘못이라니 무엇을 말이냐. 뭐, 페하께서 잘못하신 점을 굳이 찾자면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그렇게 줄기차게 안에다가 파저…….”

“아니, 그만. 하지 말아라.”


거침없는 언사하며 거리낌 없는 태도하며. 영락없는 임수였다. 경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 된 것인지, 또 어찌하면 그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지를 고민했다. 회임증후군? 그것이 대체 무어길래. 경염은 지난 2년을 되돌이키며 자기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분명 하지 말라고 했었지. 깊숙한 곳에 넣고 빼지도 않으면 하루 종일 배앓이를 한다고 말이다. 그래도, 어찌 그런 순간에 내 마음대로 조절을 할 수 있겠어. 게다가 후사를 보는 것은 종묘사직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바라던 황실의 중대사거늘. 꼭 내 의지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아이를 보고 싶은 것은 너와 나,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양인과 음인의 합이 조화롭다고는 해도 음인 사내는 회임이 어렵다 하여 마음 졸인 날들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다른 여인을 들이라는 야속한 정인의 청탁을 모두 물리고서 끝까지 그만 고집했던 경염이었다. 황실의 손을 원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와의 아이여야만 했다. 그것이 다 가진 천자가 오롯 끝까지 바라는, 그러나 아직 갖지 못한 유일한 것이었다.


“수아야…….”


이대로는 못 살겠다. 경염은 서책을 넘기던 매장소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돌아보는 시선은 당장 놓지 못하겠냐며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흡사 전장을 누비던 소년 장수의 것 마냥 매섭기 짝이 없다. 허나 어찌 여기서 물러설 수 있겠는가. 경염은 매장소의 위로 올라탔다. 회임이다 뭐다 하여 벌써 반 년 째 제대로 합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오너라. 경염.”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다. 샤오수. 이러는 이유라도 알아야겠어.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 게야.”

“나오라고 했다?”

“수아야. 이대로 가다간 정말 말라 죽을 지경이다. 이를 모르겠……윽!”


대량의 황제, 소경염. 침상에서 아내에게 배를 걷어차이다.

경염은 걷어차인 배를 붙잡고 침상 밖으로 굴렀다. 공격이 들어올 줄 몰랐기에 유난히 무방비했던 몸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고 나서도 제게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어 경염은 커다란 눈을 꿈벅거리며 매장소를 바라봤다. 그는 경염이었고, 정왕이었고, 황제였다. 이는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나가. 물소.”


아닌가 보다. 매장소, 아니 임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읽다 만 서책을 마저 넘겼다.







꿈인지, 아닌지. 살았는지 또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무아지경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침대에 누운 두 다리는 얌전한데 걷는 걸음은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허공 속을 헤매었다. 보기 드문 열병이었다. 계절은 여름도 지나 가을까지 당도했거늘 열사(熱死)를 의심케 하는 고열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보기 드문 열병이었다.


황제가 크게 앓는다는 소식이 황궁 곳곳으로 전해졌다. 벌써 삼일 째인데 차도가 없다 합니다. 어의들은 전전긍긍하며 황제의 곁을 맴돌았지만 이렇다 할 해결책은 내놓지 못했다. 폐하께서 열병을 앓고 계신 까닭은……. 하나같이 말을 아꼈다. 왜냐면 그 이유가 입 밖으로 내기에는 퍽 민망했기 때문이다.


수아야.


희미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저만치 앞서 꽃길을 걷고 있는 사내를 말이다. 몸은 뜨거운데 바람은 포근하다. 춘풍이 아우르는 언덕길을 숨도 차지 않고 걷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깟 열병이 무슨 대수인가 싶다. 네가 건강하고, 네가 살아있고, 네가 나를 사랑하여, 네가 내 곁에 머무는데. 세상만사 희로애락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네가 내 전부인 것을.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와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애가 탄다. 수아야. 샤오수. 장소, 아소야. 이제는 아무 의미 없을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부르는 이름 모두 너이다. 경염은 뜨거운 몸을 가누며 꽃무더기를 해치며 걸었다. 이지러지는 꽃향기가 너절하게 흘러넘치는 이곳에서도, 그가 품은 매화향 만이 오롯하다. 눈을 멀게 할 것처럼 뜨거운 열병이라 해도 코로 맡는 향을 멈출 수 없었다.


경염은 끝내 그를 품에 안았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흰 목덜미에 코를 묻어 움씬 향을 들이켰다. 맡는 내음이 황홀하다. 언제까지고 맡고만 싶은 그의 향을 모조리 누리며 몸을 돌려 세웠다. 하얀 얼굴. 꽃 같은 눈길. 나비 같은 눈꺼풀. 사라락 날갯짓을 할 때마다 마음이 한없이 녹아.


과연 너이다. 그대이다. 어여쁘다. 경염은 그에게 입을 맞췄다.



아, 열락기(悅樂期)로구나.



경염은 그제야 자신을 에워싼 열기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양인에게 오는 열락기였다. 번성할 시기이며 번식을 탐하는 때이다. 허나 황실의 손들은 열락기를 거치질 않았다. 발정하여 음인을 탐하는 것은 격조에 맞지 않아 어렸을 때부터 다루는 훈련을 하거나 어의들의 처방으로 거의 겪지 못하는 증세였다.


어찌하여 지금 이 시기에 맞물려 찾아왔을까. 회임을 한 이후로 희락기가 사라진 정인을 대신하여 앓는 병인지도 모르겠다. 경우에 따라서는 입덧을 대신하는 이도 있다던데. 마음에 온전히 품으면 그런 것까지도 나누는 모양이다. 그러니 저에게 대신 찾아온 것이다. 정말 그런 이유에서라면 경염은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라.


뭐라고 말을 하려는 겐가. 꿈속의 얼굴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속삭였다. 경염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로 다가갔다. 꿈이든 뭐든 좋으니 당장이라도 그를 품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이거 놓아라, 경염.


꿈에서 깨어난다. 번쩍 뜬 눈이 익숙한 천장을 더듬거렸다. 현실인가? 현실이다. 눈앞에는 매장소가 있었다. 황제가 며칠을 앓고 있단 소식에 찾아 온 것이다. 요요하게 웃던 꿈과 달리 그는 여전히 삐딱한 눈길로 경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경염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어릴 적 임수의 얼굴로 보였다. 제가 아프거나 다칠 때면 꼭 찾아와서는 오만 인상을 찌푸린 채 나무라곤 했다. 너는 어떻게 몸을 간수했기에 아프고 그러냐며. 지금의 매장소는 그와 꼭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수아야.”

“무슨 꿈을 그리 험하게 꿔.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으니. 게다가 며칠이나 누워있으려는 거야. 걱정하는 사람들이 천지다. 슬슬 일어나야지 않겠어.”

“아소.”

“내가 무거운 몸을 끌고 여기까지 와야 속이 시원……옌!”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꿈에서 깨어났지만 경염은 여전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뻗은 팔은 벗어나려는 매장소를 가득 품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힘으로는 댈 것도 아니었다. 파드득거리는 매장소의 팔까지 고이 접어 당긴 경염은 그를 보료 위로 쓰러뜨렸다. 열 때문에 뜨거워진 숨이 턱, 턱 터졌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있으려는 그는 말도 못할 인내심으로 스스로를 누르는 중이었다.


“나와라, 경염. 너는 지금 온전한 상태가 아니야.”


열락기의 양인에게서만 나는 짙은 향에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그제야 매장소는 제가 꽤 위험한 상황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물론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빨리, 옌…!”

“이제, 내가……싫으냐?”


더운 숨을 한 번 더 참고, 경염이 물었다. 그로서는 좀처럼 하지 않는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아무래도 열락기 특유의 본능적인 감성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매장소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싫냐는 질문을 할 수 있어. 그가 싫었더라면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매 황후. 아닌 척 하고 살았지만 여태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 나와.”

“이젠……. 내가 그 마음에 없느냐?”

“아니야. 아니라고!”

“그렇다면 왜…….”


나를 받아들이질 않아. 경염은 여전히 숨을 몰아쉬며 되물었다. 덕분에 매장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제 정신이 아닌 경염과는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품을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물론 시도는 시도로만 그쳤다. 어떻게든 이성의 한 가닥만은 남겨놓으려는 경염이 그의 손목을 꽉 눌러 잡고는 위로 그림자 되어 그늘졌다. 지금도 겨우 참고 있는 얼굴이 매장소를 온전히 내려다봤다.


피할 길이 없음이다. 매장소는 눈을 감으며 체념했다.


“무섭다. 두렵기도 하고.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 복중에……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

“이미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알아. 그래도……. 내가 영영 내가 아닌 사람이 될까봐 문득 두려웠다.

“……내가, 원망스러우냐?”


한참 속을 끓이다가 겨우 밖으로 꺼낸 질문이었다. 경염의 눈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당장 참고 있는 것만 해도 버거울 텐데, 와중에 그의 마음을 먼저 묻고 싶어 억누르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너를 내가 어찌 싫어하겠어. 임수는 한숨을 내리 쉬며 저를 에워싼 경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얀 손이 그의 얼굴을 부드러이 어루만졌다.


“원망스럽다고 하면, 없는 것이 되느냐?”

“하지만.”

“미워한다고 하면, 연모하지 않는 것이야?”


아니지. 아무래도 투정이 과했던 모양이다. 매장소는 그제야 픽 웃었다.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경염은 대답 대신 애정을 바라는 짐승처럼 고개를 숙이고, 뺨을 어루만지던 손바닥으로 방향을 틀어 닿는 곳곳마다 빠짐없이 입을 맞췄다.


“흐…. 간지럽다. 옌. 그만…….”


아예 매장소의 손목을 움켜 쥔 경염은 더욱 진득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간지럽기만 했던 손바닥이 뜨거운 입맞춤으로 물씬 달아올랐다. 얼굴도 화끈 달아올랐다. 손을 빼내려했지만 경염은 놔주질 않았다. 정성스럽게, 촘촘하게 맞추던 입술이 가느다란 팔모가지로, 또 팔뚝으로. 차츰차츰 내려왔다.


옷 섬이 풀어지고 허연 설원이 드러났다. 불러 온 배가 불뚝했으나 하나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그와의 잠자리를 꺼려 온 매장소였지만 지금 와서는 어찌해도 경염을 막을 수 없었다. 열락의 기운이 폴폴 풍겨 뜨겁게 잠식했다. 하얗게 드러난 몸뚱이가 입을 맞추는 자리마다 비틀어지며 죽겠다고 끙끙 앓았다.


“…네가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어. 말하지 않았느냐.”


점점 버거워지는 숨을 토하면서도 경염은 빠짐없이 고백했다.


“어여쁘다. 또, 어여쁘다.”


하염없는 고백에 얼굴의 물도 점점 색이 달아올랐다.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 돌린 고개를 제게로 다시 돌리곤, 빼곡이 입을 맞추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오직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하얀 몸에 하나, 둘. 꽃이 피었다.


“보아라, 네게 온통 꽃이 피었다.”


경염은 그제야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알렸다. 피었노라고. 꽃에 꽃이 피었노라고.

적자색의 꽃이 말이다.




“……오늘, 내가 이 꽃을 다 따련다. 아소.”




황제의 손이 그의 화원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아직 해도 가라앉지 않은 중천의 끝물이었지만 앞으로 며칠 간, 그들은 낮인 듯 밤인 듯 시간도 모른 채 헤매게 될 것이다. 둥그런 배에 입 맞추고 적자색 꽃의 개수를 헤아리며. 물오른 젖가슴을 물고 하염없이 희롱하며. 또 침범하며, 귀애하고, 보듬고, 속삭이며.





그야말로 열락의 시작이었다.











/@SEOBANG




금릉 사랑꾼 소경염. 

(아 이제 지겹다 정말 이 끝없는 사랑, 너무 지겨워서 백 년만 더 보고 싶네) 


색 합작에 참여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다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정매군요:) 모두 정매 안에서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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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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