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야방 #정왕종주 #정매 #경염임수





적염군이 몰살 됐습니다.



그림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은밀하고 어딘가 음험하여 뒤로는 계략을 감추고 있는 느낌이 흉흉했으나 듣고 있던 황제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8만 대군인 적염군이 몰살 됐다. 건네 온 말을 넌지시 읊조리던 황제가 되물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죽었느냐? 목소리가 묻는 바는 의중이 분명했다.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림자의 머리가 좀 더 아래로 숙어들었다. 허리가 굽어지고 무릎마저 바닥에 닿았다. 곧 이마가 무릎이 있는 곳까지 떨어졌다.


“눈 천지가 온통 피로 물들었습니다. 살아있는 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 아무리 천하제일 적염군이라 할지라도 대유국과의 전투로 지쳐있던 터였다. 예기치 못한 상대로부터 공격을 받은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절벽 사이에서는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울려 퍼져 온 사방으로 튀었다. 하얀 곳은 거의 없었고 붉은 천지가 되었다. 참으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임섭 장군의 목을 친 자 또한 목숨을 거두었습니다.”


적염군의 대원수는 일찌감치 생을 마쳤다. 호랑이의 기세가 명명백백하던 위대한 장수는 화살을 7발이나 맞고도 검을 휘두르다가, 등 뒤를 찌르는 칼에 심장을 꿰뚫려 죽었다. 목숨이 끊어진 것을 직접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고, 보고를 받는 즉시 장군의 원수를 직접 처단했다. 이로서 모든 일은 흑막에 가려 사라졌다. 비밀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그렇다면…….”


내내 듣고만 있던 황제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가 묻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평탄치 못한 목소리가 초조했다. 황제의 심중을 파악한 남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곤 그가 원하던 답을 고해 바쳤다.


“……백호(白虎)는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황제가 정녕 듣고 싶어 하던 한 마디였다. 그제야 황제는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본 자는 기껏해야 곁에 서 있던 고 태감이 전부였다. 그는 황제를 따라 눈을 감았다. 제국에 떠올랐던 위대한 별이 채 피기도 전에 졌다. 영명한 빛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제 다시 제국의 어디에서도 흰 호랑이를 보게 될 일은 없으리라.


……물러가라. 안도와 동시에 긴장이 풀린 목소리가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황제는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랑이가 죽었다. 백호 또한 나란히 제 아비의 길을 따라갔다. 이제 그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은 없을 터. 그럼에도 마음이 개운하지 못한 까닭은 여우의 피를 타고 났음에도 그는 여전히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친우를 멀리 보냈음에도 차마 배웅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비로소 나라가 평탄해지겠구나.”


하여, 제 손으로 씨를 말린 호랑이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몰염치하다 해도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나머지도 처리하거라. 황제는 조용히 읊조렸다. 곁에 서 있던 고 태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고갯짓을 이해 한 병사는 빠르게 대전을 가로 질러 사라졌다. 이제 다시 제국의 어디에서도 그림자를 보게 될 일은 없으리라. 대전의 하얀 문풍지 위로 그림자의 피가 튀었다. 즉사. 그는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

늙은 여우는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남자의 주인

written by SEOBANG








굽이치는 말발굽이 대지를 흔들었다. 땅을 박차고 나서는 굽이 떨어질 때마다 흙모래가 요란스럽게 튀었다. 모래 바람이 자욱하게 이는 위로는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양 나라의 전방을 지키는 백호군(白虎軍)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붉은 천에 자수 놓은 검은 글자는 펄럭거리는 바람에 보일 듯 말 듯 했지만 그 기상만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것이라, 선봉에 선 사내가 지나갈 적에는 나무와 풀들조차 고개를 조아리며 가는 길을 내주었다.


양 나라의 수도 금릉. 사내는 금릉과는 이틀 밤을 새서 달려도 겨우 닿을까 말까한 변방에서 승전보를 손에 쥐고 막 돌아오는 참이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거침없이 금릉에 진입하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는 듯 하지만 백호군의 군사들은 대부분 맹수(猛獸)의 핏줄을 타고 난 이들이었다. 


굳이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그 기세가 대단했다. 다른 인간, 하물며 토끼나 개, 다람쥐나 사슴 같은 이들이라면 그들의 기운에 눌려서라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다.


그런 자들의 선봉에 선 사내의 기운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정갈한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 고요한 눈동자에는 차마 동요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차분한 만큼 견고하고, 견고한 만큼 딱딱한 사내. 어느 순간부터 죽어버린 마음을 닮은 가면 같은 얼굴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가 황제의 일곱 번째 아들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두 부자는 도통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는 아비보다는 어미의 핏줄을 더욱 강하게 타고 났다.

사내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 말에서 내려 본궁으로 향하는 사내의 뒤로는 망토처럼 펄럭거리는 짐승의 혼현(魂現)이 아른아른 피어올랐다.



“멈추십시오. 정왕 전하.”


정왕(靖王), 경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은 아니나 늘 달갑지 않은 순서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를 내는 것은 미련한 짓이기에 사내는 오로지 정면을 주시했다.


“황상의 명패 없이는 못 들어가십니다. 황상께 사람을 보냈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았다.”


황실의 일곱 번째 핏줄이라고는 하나 그는 서른 한 살이 넘도록 여태 군왕에 머물러있었다. 친왕에 이르지 못한 황자. 강직한 성품과 굽힐 줄 모르는 고집 때문에 진작 황제의 눈 밖에 난 뒤로는 전장과 전장으로 불려 다니며 금릉에는 얼씬도 할 수 없는 황손. 그에 대한 소문은 파다했다.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사내는 끝끝내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바로 그런 점이 부황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언제쯤에나 입궁할 수 있을까. 저번에는 세 시진이 넘도록 기다린 적도 있었다. 익숙한 대우였다. 황제에게 그는 없는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모후인 정비 역시 잊힌 지 오래였다.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가 12년 전 반역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몰살당한 적염군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을 기억하고 있는 자는 아직 살아있다. 사내는 단 한 번도 적염군을 부정하지 않았다. 적염군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소식이 수도 내에 공공연하게 오르내릴 때에도, 결국 반역군이라는 낙인을 찍고 모든 역사서에 그리 기록 될 때에도.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황의 앞에서 적염군의 사건을 재조사 해달라는 청탁을 올렸고,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부자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이르렀다.


“도대체 오늘 꼭 알현을 올려야 하는 이유가 뭔데.”


두 시진이 흘렀다. 사내의 뒤를 지키고 있던 척맹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주군에 대한 황상의 홀대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두 시진 동안 꼼짝없이 서 있으라는 것은 그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옆에서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일전에는 폐하를 뵙지도 않고 돌아갔다는 이유로 석 달 동안 황릉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습니다.”


뒤에서 조곤거리는 목소리를 훤히 듣고 있으면서도 사내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몸에 익을 대로 익은 일들이다. 아무리 부당하여도 거스를 수 없는 일. 저 혼자만의 목숨이 달린 일도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좀처럼 걸음하지 않는 황제를 기다리며 육궁 안에 기거하는 제 어미를 떠올리면 이깟 몇 시진의 기다림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사내는 묵묵히 눈을 감았다. 짐짓 끓어오르려던 제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였다. 부황은 아들의 기운을 몹시 꺼려했다. 그가 호랑이도, 하물며 아비를 닮은 여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하. 폐하께서 안으로 들라하십니다.”

“알았다. 나머지는 본 왕이 나올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라.”


뒤도 돌아보지 않는 단호한 걸음이 앞으로 걸었다. 계단을 오르는 성큼한 걸음 뒤로는 모두의 고개가 기다렸다는 듯 조아려졌다. 어찌 됐건 그는 황손이었다. 위대한 황실의 후손. 그에게 죄가 있다면 호랑이, 그것도 흰 호랑이로 태어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이미 죽은 흰 호랑이를, 마음에 품은 것뿐이다.



“소자, 서산영에서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아들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은 예전만큼 매섭지는 않았다. 이미 십여 년 전의 기억. 여전히 탐탁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지만 핏줄로 이어진 부자의 연을 끊을 수는 없을 터. 변방에 돌려가며 무수한 군공(軍功)을 세웠던 아들이다. 황제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인 아들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번듯한 얼굴과 훤칠한 풍모는 젊었을 적의 저를 꼭 닮았다. 물론 그리 생각하는 것은 황제뿐이었지만 말이다.


“최근 군의 정황입니다.”


두 손으로 바쳐 올린 보고서를 회수하는 것은 고 태감의 몫이었다. 올린 보고서를 들고 황제에게 건네자 방금까지도 황제의 곁에서 서로 더 친한 척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두 사내의 눈살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한 명은 태자. 동궁의 주인으로 다음 황위에 오를 사내였다. 아직 제 혼현을 감추는 방법을 터득하지도 못한 그에게선 호랑이의 냄새가 역력했다. 그의 어미이자 황제의 총비인 월 귀비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혼현이다. 허나 애석하게도 백호는 아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예왕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태자와 달리 제 혼현을 감추는 것에 능숙한 이 능구렁이에게서는 의외로 여우의 냄새가 폴폴 풍겼다. 그의 모후는 황후였으나 양자로 들어 온 예왕이었으니 황후를 닮을 리도 없을 터, 반대로 아비인 황제의 핏줄도 아니었으나 그는 태어나기를 여우로 태어났다.


동족의 핏줄이어서 였을까. 황제가 그를 귀애하는 것도 서로 여우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야 오래 전부터 유명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예왕의 처세술이나 능력은 태자보다 한참 월등했다. 그가 일찍이 친왕의 자리에 오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정왕, 먼지라도 좀 털고 오지. 누가 갑옷 차림으로 대전에 들라 하더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은 태자였다.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태자는 정왕의 차림새를 나무랐다. 꼬투리를 잡기 위함이었다.


“정왕부에 들러 깔끔하게 하고 왔어야지. 네 눈에는 부황이 그리 우습더냐?”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경염은 두 손을 모으고 고해 올렸다.


“사흘 안에 금릉으로 오라는 황명을 받들기 위해 미처 행색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답을 하긴 했으나 태자의 질문을 교묘히 피한 답이었다. 달리 보면 그를 무시한 처사이기도 했다. 대쪽 같기로 유명한 정왕의 성격만큼 유명한 것이 또 있을까. 알면서도 괘씸함에 발끈한 태자가 언성을 높였다.


“형님이 묻는데 대꾸도 안 해?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변명이나 늘어놓고. 지금 해 보겠다는 거냐?”

“저 성격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부황 앞에서 언성을 높이십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는 건 언제나 예왕 쪽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기울어진 눈매로 정왕과 태자를 모두 살피면서도 적절한 순간에 그럴싸한 역할을 낚아채갔다. 정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태자의 주적(主敵)은 역시 예왕이었다. 태자의 자리에 오른 지도 벌써 5년도 지났건만 황제로부터는 양위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 사이 기세등등하게 치고 올라 온 예왕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견주며 다음 황위를 두고 고군분투 하는 중이었다. 태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 마디 하려는데 황제가 그들을 제지했다.


“그만, 그만.”


늘 있는 일이었지만 볼 때마다 썩 마음에 안 드는 일인 것도 사실. 태자와 예왕의 기 싸움을 말린 황제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시킨 일은 잘 하긴 했는데, 걸핏하면 대드는 성질머리는 여전하구나. 정왕.”


결국 불똥이 떨어지는 것은 정왕이었다. 허나 이 역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 딱딱하게 굳어있던 사내의 얼굴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제는 딱히 억울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제는 가르치기도 귀찮구나. 그만 가 보거라.”


언급하고 싶지 조차 않다는 양 손사래를 쳐 훠이 내쫓는 행색에서 귀찮음이 절절 묻어났다. 그 모습에 태자와 예왕이 고개를 내젓는 사이, 인사를 올린 경염은 일어나 바로 뒤를 돌았다. 걸음 따라 펄럭거리는 청 푸른 망토가 그의 그림자까지 모두 휩쓸고 사라졌다.







양 나라의 황실은 실로 혼란스러웠다.


황제, 소선제는 절친한 벗이었던 임 장군과 국공의 도움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즉위 후, 벗이자 충신이었던 임 장군이 모반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의 군대인 적염군을 전군 몰살시키며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다. 당시 황장자였던 기왕이 모반을 일으킨 적염군의 처결에 의구심을 품고 황제에게 대들었으니 그 또한 모반에 가담했다는 죄를 면키 어려웠다. 결국 황장자는 아비로부터 독약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실로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벌써 12년 전의 일이다. 황실과 금릉을 죄 흔들어 놓았던 이 사건은 더 이상 누구의 입에도 오르내리기를 꺼려하는 암묵적인 비밀이 된 지 오래였다. 정말로 적염군이 모반을 일으킨 것인지, 정녕 황실을 해하려 했는지에 대한 진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이야기만 나오면 펄쩍 뛰는 황제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은 여전했다. 경염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 그는 여전히 적염군의 결백을 믿고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미 죽고 없어진 자들과 함께였다. 기왕에게서 바른 정치와 청렴한 뜻을 배웠고, 소년 장수로 이름을 날리던 적염군의 소원수, 임수와 모든 순간을 함께 했다. 적어도 경염이 기억하기로는 그들은 결코 모반을 일으킬 인사들이 아니었다.


-전하. 전영입니다.


생각의 흐름이 문득 끊겼다. 찻잔을 쥔 채로 가만히 돌리던 손목 역시 우뚝 멈췄다. 들라하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읊조렸다. 곧 문이 열렸다.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곧바른 전영의 보고에 경염은 숨을 들이켰다. 얼마 만에 돌아 온 정왕부인지, 감회를 느끼기도 전에 금릉은 다시 한 번 혼란에 휩쓸릴 준비로 분주했다. 그 중심에는 여우와 호랑이가 있었다. 예왕과 태자의 황위 계승을 둔 암투는 나날이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매장소(梅長蘇)가 금릉에 당도했다 합니다.”



……그렇군. 잠시 멈췄던 손목이 빙글 돌아갔다. 찻잔의 밑바닥을 겨우 적신 찻물이 덩달아 흔들렸다. 생각이 깊은 얼굴에는 수심이 함께 드리웠다. 길게 그림자 진 속눈썹 아래로 매달린 근심은 끝이 없었다. 모르지 않기에, 전영은 고개를 숙였다.


“서산영까지 해결하고 왔으니 당분간은 금릉에 머물러 계실 것이 아닙니까. 어찌 할까요.”


매장소. 천하의 기린재자. 그를 얻는 자, 천하를 얻으리라.


경염은 문득 그에 대한 찬미의 여구를 떠올리며 비스듬히 눈가를 내리 떴다. 아무도 가망을 점치지 못했던 북연의 6황자를 태자의 보위에 올렸다는 소문은 저 멀리 그가 있던 전장까지 이르렀다. 그 주역이 매장소, 강호 제일 방파인 강좌맹의 종주라는 사실까지도. 그러나 그의 귀에 닿은 소식이 다른 이들에게는 닿지 않을 리 없어, 벌써부터 예왕과 태자가 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소문 역시 함께 들었다.


그럴 테지. 경염은 문득 픽 웃었다. 헛바람이 새나가는 미소의 끝은 허망했다. 언제부터였더라. 경염은 진실로 웃는 법을 잃었다. 숨 쉬듯 자연스러웠던 미소는 어느 날부터 자취를 감췄다. 마음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만나봐야겠다.”


12년. 무려 12년이 흘렀다. 이제는 때가 되었어. 무르익은 시간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오래도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 흉측한 것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독이 되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언젠가는 저마저도 잡아먹으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자를, 직접 만나봐야겠어.”


서 있던 사내와 마주친 경염의 눈길은 고요히 타오르고 있었다. 눈치를 볼 여우도, 색이 누런 호랑이도 없는 이곳은 온전히 그의 영역, 그의 공간이다. 전영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역시도 설표(雪豹), 맹수의 혼현을 지니고 태어났지만 기세등등하게 떨치는 주군의 앞에서만큼은 어떤 기색도 하지 못했다.


경염의 혼현은 느릿느릿 타올랐다. 성급하지 않고, 또 돌아가지 않는 그의 성격을 꼭 닮아있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짐승의 기운이 늦은 밤, 정왕부 곳곳까지 넘쳐흘렀다. 그가 비로소 때가 되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납작 엎드려 있던 몸을 떨치고, 이제야 일어나야 할 때가 왔노라고.




그의 등 뒤에서 피어오르는 형상은 검은 늑대(黑狼)

경염은 비로소 발톱을 세울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죽은 소년.

12년 동안 한 날 한 시도 잊어본 적 없던 그의 정인(情人)을 기리기 위함이다.












/@SEOBANG


드디어 사고를 치는 군요.

수인AU. 원작을 모호하게 비틀어버리는 랑야방, 정왕종주. '남자의 주인'입니다.


본 소설은 1월 14일에 있을 '찬매랑가'에 신간으로 나올 예정이며, 완결 후 비공개로 전환됩니다.

(시간이 빠듯한 관계로 웹상에서는 완결까지 보지 못하실 수도 있는 점. 미리 말씀드립니다.)


전작과 분위기가 너무 달라 당황하실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목표는 랑야방을 보지 않으셨더라도 이해가 쉽게 되도록 쓰는 것인데, 원작이 너무 탄탄한 구성을 갖춘 이유로 솔직히 자신은 없으니.........랑야방을 봐 주세요. (꼭...)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가 볼 생각입니다. 서사 중심보다는(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나...)정매에 기반을 두고 쓰고 싶네요. 부디 20편 내외로 완결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아멘)


다소 캐붕의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 흑정왕) 주의해 주십시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도 당신의 마음에 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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