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UNDING CUFFS

SEX PISTOLS. MR HAWK&RABBIT







남자는 그곳에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곳곳에 매달려 있었고, 하루 종일 음식이나 음료를 들고 나르는 웨이터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모조품이겠지만 세계의 내로라하는 명화들이 벽면을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홀 정 가운데서 조금 떨어진 구석에는 무려 밀로의 비너스가 두 팔을 잃은 채 조형 분수대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파티의 호스트는 꽤나 난잡한 취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 진열해 놓는다고 해도 조화롭지 못하면 소용없었다. 심지어 가짜라면 더더욱.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마티니 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렸다. 느릿한 손목 스냅에 따라 노란빛을 띄는 액체가 잔 안에서 찰랑찰랑 흔들렸다.


시끌벅적하지는 않더라도 홀 내부의 소음 덕에 충분히 부산스러웠다. 남자가 기피하는 여러 장소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두 가지가 바로 시끄러운 곳,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곳은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계속 홀 어딘가에 자리를 차지한 채 서 있었다. 그는 검은 셔츠와 진회색의 수트를 입고 있었는데, 커프스 버튼이 금색이라 그런지 그가 글라스를 들어올리고, 내려놓을 때마다 자연스레 시선을 끌곤 했다. 정확히는 그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단정한 짧은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어딜 봐도 동양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외모였지만 그 선과 이목구비의 정교함만큼은 그리스 신화에서 튀어나온 듯 우아했다.


남자는 최소한으로 움직였고, 말은 아예 하지 않았으며 이런 파티가 익숙지 않은 듯 시선을 왼쪽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한 번씩은 그를 흘끔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도 풍겨져 나오는 압도적인 분위기는 간혹 몇몇 사내들의 시선까지 강탈해 갔으며, 동시에 대다수의 남자들의 질투를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 잘 벌어진 어깨에 맞춰 딱 떨어지는 바디 라인에는 군살이 없었다. 오히려 그 안에 있을 탄탄한 근육 조직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몸의 어느 한 구석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감추듯 단추를 목 끝까지 여민 사내에게서는 금욕적인 욕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덕분에 여자들은 황홀해졌고 남자들은 불쾌해졌다. 당연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moon river’ 인가? 홀에는 세계의 명곡들을 관현악으로 재편곡한 클래식이 시종일관 공기처럼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이 파티의 호스트가 지극히 평범한 취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자 남자 역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 쪽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잠시 눈을 감고 곡을 감상하던 남자가 눈을 뜬 것은 자신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였다.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키는 비슷하거나 약간 큰 정도. 딱히 살의나 전투 욕구는 없는 것 같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방심하지 말 것. 향수는…존 갈리아노? before midnight.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향수였다. 이 모든 판단이 불과 1초도 안 되는 찰나에 이루어졌다. 오랜 특훈의 결과였다. 남자는 눈을 떴다.


“이런 곳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분이시네요?”


눈앞에 서 있는 사내는 그의 향수 초이스에 대한 능력이 탁월한 것임에 분명했다. 말 그대로, before midnight이 몹시도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그러나 곧 남자의 기분은 불쾌해졌다. 향수 냄새로도 가려지지 않는 ‘호랑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성함이?”


호랑이 냄새에 코끝이 시큰거릴 정도였지만 사내는 도저히 호랑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뺨 위로 솜털이 보일 정도로 앳된 기운이 숭숭했다. 나이는 이십대 초중반.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새카만 머리카락 끝이 구부러져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재벌가의 아들임에 틀림없는 부티가 흘러넘쳤다. 게다가 하얀 피부색만큼이나 하얀, 올 화이트 수트가 그의 존재감을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각기 고위 계층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이 파티는 저마다의 색깔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는데, 오직 둘만이 독보적으로 대비되는 색깔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랙 앤 화이트.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남자는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강 하준입니다.”

“아하, 하준 씨.”


남자는 그의 이름을 되묻지 않았다. 통성명의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 유민.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준은 이미 그의 프로필에 대해 어느 정도는 꿰고 있었다. 일본 최대 야쿠자 폭력단.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보스이자 이 파티의 호스트이기도 한 츠카사 시노부(司忍)의 비서. 표면적으로는 비서였지만 실상은 정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프로필을 떠올릴 때 즈음, 하준의 눈가가 상대를 탐색하듯 가늘어졌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처음 뵙는 분인 것 같은데….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사업하고 있습니다. 제너럴 모터스의 한국 지부에서 근무 중이죠.”


거짓말이었다. 하준의 프로필은 만들어진 것으로, 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임시적인 신분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에 대해 특별히 의심 하거나 더 캐묻진 않았다. 통성명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절차나 관례에 불과했다. 사내는 빙긋 웃고는 마찬가지로 들고 있던 글라스를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앳되다. 사진으로 봤을 때부터 저런 사내가 정말로 야쿠자 보스의 정부인가 싶을 정도로 하얗고 유순한 인상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어려 보였다. 때 하나 묻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 남자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하준은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의 임무는 파티가 열리고 있는 유람선이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기 전에 보스인 츠카사 시노부를 저격하는 것이므로.


이 일에 미 중앙정보국인 CIA가 개입되어 있었고, 이번 임무에 미합중국 대통령의 특별명이 떨어졌다. 위장 침입 및 목표 대상 저격 요원으로 하준이 선발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일단은 그가 동양인이기 때문이었다. 저격 대상이자 파티의 주최자인 츠카사 시노부는 백인 혐오증이 있어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거기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임무 수행은 지원 병력 투입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니 요원이 독자적으로 임무를 성공시켜야만 했다. 야쿠자들이 득실거리는 유람선 안에서 그들의 보스를 저격하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고, 성공한다 해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임무였다. 때문에 정확한 판단력과 빠른 행동력. 무엇보다도 뛰어난 저격 실력을 갖고 있는 자여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준은 가장 이상적인 요원이었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장 유민이라고 해요. 주최자인 츠카사 상 대신 이번 파티를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있죠. 그런데 처음 보는 분이 계셔서….”

“네,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준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원래가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는 말 대신 글라스를 들어 다시 목을 축였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호랑이 냄새가 불쾌한 것은 사실이나 눈앞의 남자에게 자연스레 쏠리는 관심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호랑이라니. 하준은 속으로 픽 웃었다. 눈앞의 남자와 호랑이는 정말이지 안 어울렸다.


“배가 도착하려면 3일은 족히 걸릴 텐데. 뭐하고 지내실 건가요?”

“딱히 계획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시간을 보내시는 건 어떠세요?”


사내의 제안에 하준의 눈길이 슬그머니 그를 향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요. 그는 퍽 수줍게 웃으며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러나 하준의 경계는 더욱 심해졌다.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제안은 의심해 볼 여지가 충분했다. 혹시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거라면 일은 곤란해진다. 물론 그럴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는 준비되어 있었지만 하준은 가능하면 조용하고,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길 원했다.


“바쁘시지 않습니까? 호스트이신 셈인데.”

“그래도, 오랜만이거든요. 츠카사 상을 제외한 사람과 이렇게 오래 얘기를 나누는 건….”


그들이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오래 얘기를 나눴다고? 그 말만으로도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만 했다. 미리 알아 본 프로필에 의하면 츠카사는 이 남자를 끔찍이도 싸고돌았다. 그가 어딜 가든지 남자가 함께였다. 하준은 문득 후배인 진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사내놈 구멍 맛이 아주 쫄깃하긴 한가봐, 응? 그냥 아주 어딜 가더라도 데리고 가서 옆에 앉혀놓고는 물고 빨고…. 하이고, 진짜 노친네. 밝히기는 드럽게 밝혀요.’


“그리고 저 없어도 파티는 돌아갈걸요? 200명 정도 배치되어 있고….”


그렇다면 감시하는 시선이 분명 있을 텐데. 하준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기운이 남다른 사내들이 주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준은 다시 그를 바라봤다.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기색을 숨길 수 없는 앳된 사내에게서는 남다른 사연의 냄새가 폴폴 풍겼다. 임무와는 별개로 호기심이 생겼다. 굳이 타인의 아픈 과거를 끄집어 내 듣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것과도 별개로. 아주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본능적인 호기심이.


“…어떠세요? 저 쪽 바에서 한 잔 하실래요?”

“저도 슬슬 무료하던 차였습니다.”


어쩌면 임무 수행에 있어서도 좋은 기회일지 몰랐다. 하준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사내는 기쁜 듯이 활짝 웃고는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사이였는지 냉큼 하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강압적이기는 커녕 오히려 어린애 같은 행동이었다. 장난감 코너로 부모를 끌고 가는 듯한 손길에 하준은 별 다른 거부감 없이 그와 동행했다. 이런 남자가 야쿠자 보스의 정부라…. 점점 더 묘연한 구석이 생겼다.


“그런데, 저 이전에 다른 사람들이 와서 말을 걸진 않았나요? 아까부터 여자 분들이 하준씨만 쳐다보는 것 같던데.”

“딱히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하준씨는 뭐랄까….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있거든요.”


사실이었다. 하준은 별 다른 감흥 없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쉽게 와서 말을 걸 수 있는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맹금(猛禽)류의 독자적인 분위기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했지만 묵직했다. 동시에 날카로웠다. 아마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굳이 츠카사의 감시가 아니더라도 풀풀 풍기는 호랑이 냄새 때문에 어지간한 원인(猿人)은, 같은 반류라도 그와 오랜 시간 눈을 마주치고 있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다른 사람들과 오래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하준은 그 기운에 밀리지 않을 뿐이었다. 호랑이가 육지를 평정한다면 그의 혼현은 상공을 지배했다.


“…그래서 저도, 어…계속 지켜보고만 있었…고요.”


매(鷶). 하준의 눈길이 다시 한 번 가늘어졌다. 상대방의 진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하하…. 남자가 남자를 계속 쳐다봤다니. 이상한…가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에. 그거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대답처럼 들리는데…. 그런 성격이셨어요?”

“맞는 걸, 틀리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준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었다. 혼현의 특성 상 매의 시야는 상당히 넓었다. 그는 눈동자 한 번 움직이지 않고서도 이 넓은 홀 내부를 빠르고, 빼곡하게 훑었다. 당연하게도 여럿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꽂혀 있었다. 스툴에 나란히 자리하고 앉은 남자를 주목하고 있는 눈들이 상당했다. 하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앞으로 내밀어 진 온 더 락 글라스를 빙글빙글 돌렸다. 얼음이 잘게 부딪치는 소리가 달그닥 거렸다.


“사실 하준씨 같은 분은 처음이었어요.”

“…그쪽과의 대화를 피하지 않는?”

“네! 아…. 네. 네.”


사내는 수줍은 듯 얼굴 위로 발갛게 떠오른 홍조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도 똑같은 술잔이 놓여 있었지만 그는 두 손으로 표면만 조물거리고 있을 뿐, 입 한 번 대지 않은 채 였다. 하준은 점점 더 사내의 존재가 의문스러워 졌다. 야쿠자의 정부라고? 아무리 봐도 순진한 이십대의 청년, 그 이상으로는 안 보이는데.


“동류를 피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아, 저…. 그 말씀은….”

“저도 반류입니다. 아마 유민씨와는 다른 종(種)이겠지만.”


호랑이는 중종(重種)류 중 하나였다. 먹이 사슬 최 정점에 속한 존재로 흔하진 않았지만 개체가 아주 없는 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준은 다르다. 매(鷶). 포유류나 파충류가 아닌 조류과로서 인구 중 90% 이상인 원인들과 유전자가 뒤섞일 경우는 극히 희박한 종이었다. 그의 아주 오래 된 선조들 중에서 피가 섞인 것이 틀림없었다. 하준은 흔치 않은 조류과. 그 중에서도 맹금류였다. 하준의 사격 실력이 특수 정보국인 CIA 요원들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매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한 번 눈독 들인 먹잇감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요! 어쩐지! ……아, 네. 반가워서 그만….”

“수줍음이 많으신 성격인가 보군요.”

“아니, 어. 저 원래 그러진 않은데…. 지금은 왠지 긴장이…….”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그는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앞에 있던 잔을 들어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저래도 될까 싶은 마음에 하준의 지긋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걸 의식한 모양인지 그는 다소 무리가 될 정도로 잔을 끝까지 비웠다. 잔은 곧 녹은 얼음 조각을 제외하곤 텅 비어졌다. 그는 탁 소리가 나도록 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저, 사실 술…잘, 못 하는데….”

“그런데 왜 그렇게 무리해서 마십니까. 괜찮아요?”

“아녜요! 한 잔, 어…한 잔 정도는 더 마실 수 있을 거예요….”


처음에 인사를 나누던 스마트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나사 하나 풀린 듯 당황의 연속인 그를 보며 하준이 픽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보스가 왜 그를 귀여워하는지, 그리고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애 마냥 감싸고도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나 같아도 그럴 테니까. 불안해서 밖에 내어놓을 수나 있겠나. 이렇게 잘 모르는 남자랑 단둘이 앉아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아마 온 몸에서 풍기는 호랑이 냄새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내의 손을 탔을 것이 분명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아녜요. 오늘은 왠지 좀…마시고 싶네요.”


하준은 그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두워진 것을 눈치 챘다. 그는 사연이 있을 수밖에 없는 남자였고, 아마 그 사연이 원인이라는 것 까지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지금껏 털어놓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를 보면 다들 도망치기에 바빴을 테니까. 간만에 대화 상대를 만나서 들뜬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준은 다시 한 모금, 입술을 축였다.


“저는 사실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요…. 그래서 서양 미술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네.”

“어느 날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나타나서….”


그는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그의 인생은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완전히 꼬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쳐 들어온 사내들에 의해 납치를 당해 일본까지 끌려왔고, 그것이 야쿠자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걸린 시간이 3개월. 그동안 필사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해야만 했으며 생존을 위해 배운 일본어로 회화가 가능하자 보스이자 그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50대 후반의 남자로부터 엄청난 사실을 전해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의 첩실이었다는 것.


어머니는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고, 그의 남편이자 자신의 아버지는 평범한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그때껏 물심양면으로 그를 키워왔다. 두 사람이 만나기 훨씬 전에 일본에 잠시 살았던 어머니는 무슨 기구한 사연인지 당시 보스의 정부였고, 그로부터 도망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더라는, 정말이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보스가…그러더라고요…. 너는 내 거라고…. 너만은……도망칠 수 없다고….”

“…….”

“어머니를 많이…사랑했다고…그런데 어머니가 배신을 했으니……내가 대신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하준은 그의 구슬픈 사연을 들으며 몇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어째서 20년이 넘도록 찾지 않다가 이제 와 그를 찾아냈을까. 야마구치구미는 일본 전역을 통틀어 가장 큰 야쿠자 조직이었다. 정통성과 세력. 그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는 일본 지하 세계의 왕.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야마구치구미의 세력은 일본의 정치와 경제적 측면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번에 CIA가 나선 까닭도 우익 보수파이기도 한 야마구치구미가 미·일 협정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에서도 그의 암살을 묵인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작자가 20년 동안이나 자신의 여자 하나 찾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20년이라…. 대단한 집착이군요.”

“그러니까요? 그냥 나 좀 편하게…살게 두지……. 나도 너무 궁금해서, 물어봤거든요. 그랬더니이…. 보스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전대 오야붕의 장녀와 결혼을…했었는데, 그 여자 눈에는 우리 어머니가…눈엣가시였었겠죠…. 도망친 어머니를 잡아오려고 했더니…. 그 여자랑, 그 여자 쪽 조직원들이…엄청 반대를 했었나 봐요…. 그런데 진짜…웃긴 게 뭔지 알아요…?”


말은 또렷하지 않았고 중간마다 발음도 샜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있었다. 하준은 요령 좋게도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하고 있었다. 선대 오야붕의 장녀이자 츠카사의 정실인 여자와, 야마구치구미들의 기존 간부들이 방해를 했다…이거로군.


“……그 여자랑, 우리 어머니가…같은 해에, 일주일 차이로…죽었다는 거야…….”


이로서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20년 간 이어졌던 츠카사와 그의 정실 사이에서의 신경전은 그녀가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 자신의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츠카사는 그녀가 죽은 뒤 거의 직후에 자신의 여자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역시 이미 죽어있었다. 심지어 다른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그 사이에 아들이 있다는 것마저도 알게 되었다. 분노한 츠카사는 그의 아들을 여자 대신 잡아 온 것이다.


“제가 그렇게……어머니랑, 닮았다나…봐요?”


여자와 꼭 닮은, 그녀의 아들을.


“……이런 얘기 원래…잘 안 하는데….”

“괜찮습니다.”


임무 중 사적인 대화는 금물이다. 아무리 기계 같은 인간이더라도 인간이기 때문에, 감성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모든 면에서 최상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번 임무 같은 경우에는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하준은 지금 자신의 룰을 깨뜨렸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에 반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저격 대상의 정부였다. 대상과 가장 사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 하준은 다시 한 번 진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선배도 괜히 넋 놓고 있다가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하십쇼? 인생 살다 보면 모르는 거거든~ 우리 목석같은 강 팀장님의 정신을 홀~딱! 벗겨서 구워삶을지 누가 알아?’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우울한 얘기를……오늘 들은 얘기는 어디 가서도….”

“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이야기니까요.”


하준은 당연하다는 듯 그의 말에 수긍했다.


“역시…그래주실 줄 알았어요.”


그는 정말로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고작 두 잔의 술로 완전히 취해버린 그는 바알갛게 달아오른 뺨을 한 채 헤실헤실 쪼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준은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해졌다. 뭔가가 그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생소한 반응에 하준은 소리 없이 숨을 몰아쉬었다.


“저……잠시 화장실 좀….”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일어선 사람치고는 몸가짐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휘청거리는 걸음에 하준이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크게 흔들리던 몸이 멈췄다. 하준의 팔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무게와 밀도가 둘의 시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딘가를 푹 찔린 것처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통증이 빠르게 허리선을 타고 올랐다가 팟, 하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가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자 하준은 잡고 있던 그의 팔을 천천히, 그리고 뭔가 아쉬운 듯 놔 주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고는 허리와 고개를 공손히 숙인 뒤 화장실을 향해 뒤돌았다. 여전히 불안정한 걸음걸이였다.


결국 하준은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만약 그가 또 비틀거리거나 넘어지기 전에 잡아 줄 요량이었다. 과잉 친절이었다. 차라리 다정하다면 모를까, 친절한 종류의 인간이 되지 못하는 하준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착실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화장실로 가는 복도는 인적이 드물었다. 감시원들도 대놓고 쫓아오지는 못 하는 모양이었다. 어디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체크한 하준은 묵묵한 걸음으로 그를 쫓았다.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아주 나사가 풀리지는 않았는지 그는 꿋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화장실 표지판 아래로 그의 모습이 쏙 들어가 사라졌다. 하준은 화장실 문을 열었다.


“……왜, 쫓아왔어요.”


들어서자마자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들었다.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하준은 자신의 목에 감기는 낯선 팔에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이야말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듯 입술이 달라붙었다. 물론 전적으로 상대방의 의도 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피할 틈이 없었냐고 묻는다면 하준은 답하지 못할 것이다. 밀어낼 수 없었냐고 묻는다면 더더욱. 강렬한 욕구를 동반한 두 팔은 약했지만 밀어낼 수는 없었다. 꽉 조여 무는 혀끝이 엉키기 시작했다. 욕망이 타액처럼 흐르며 정신없이 자신의 입술을 핥아대는 그는 마치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헐떡거렸다. 그를 끌어안을 수도, 밀쳐낼 수도 없는 채로 하준은 어정쩡하게 굳어 있었다. 또 다시 진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렇게 순진해 빠지게 생긴 애들이 사실은 젤루 무서운 겁니다, 어휴! 간이고 쓸개고 다 쪽쪽 빨릴 생각하면~’


“으응…. 읍…. 으….”


간간히 흘리는 비음과 함께 정말로 맛있는 것을 삼키듯 하준을 쪽쪽 빨아대고 있는 그의 혓길에 하준이 반응하고야 말았다. 하준의 커다란 손과, 굵은 마디, 마디가 하얀 얼굴을 움켜쥐었다. 주도권이 하준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리를 움켜쥐듯 감싸 안은 팔은 갑갑할 정도로 그를 옥죄었다. 오히려 그 편이 훨씬 더 기분 좋은 모양이다. 흔들리는 허리가 엉망진창으로 하준에게 부딪쳐왔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하준의 목에 감긴 팔은 풀어졌다가, 힘을 꽉 주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꾸만 힘이 풀리는 모양인지 그의 무게가 자신에게로 실리는 것을 느꼈다. 하준이 등을 기대고 있던 화장실의 문은 두 사내의 무게를 지탱하며 굳게 닫혔다.


“하아, 하…. 나, 사실은요…. 취해서…이러는 거, 아녜요….”


흐트러진 숨을 턱턱 토하며 그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가누지 못하는 몸. 바지 아래 갇혀 있을 흥분이 너무나도 뻔히 그려졌다. 그의 말대로 그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발정이 난 것이다.


“…하지만요, 나요….”


‘진짜 조심하십쇼? 괜히 명찰이 정부겠어? 이거 다 요사스러운데가 있다니까….’


“……당신을 보면, 참을 수가…없어져서….”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다시 입술을 부딪쳐 왔다. 하준의 등이 다시 한 번 쿵 하고 문에 부딪쳤다. 하준은 피하지 않았다. 엉키는 입술 사이로 오가는 호흡이 펄떡펄떡 뛰었다. 참을 수 없었다는 그의 말을 십분 이해했다. 의지와는 달리 자신 역시 흥분하고 있었으니까. ‘조심 좀 하라고 했잖아요…. 나 진짜 못 살겠네….’ 그 입 좀 닥쳐. 하준은 진호의 목소리를 무시하곤 그의 엉덩이를 움켜쥐어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덕분에 달라붙은 하반신이 탐욕스레 비벼지고 있었다. 침대만 아닐 뿐이지 둘은 섹스라도 하듯 뒤엉켰다.

그 순간, 그의 엉덩이를 쥐어 주무르고 있는 하준의 손가락 끝에 뭔가 보드라운 털 뭉치가 닿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까지는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남자는 호랑이가 아니다. 그 증거로 남자를 에워싸고 있던 호랑이 냄새가 확연히 희미해져 있었다. 하준은 털 뭉치를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 품에 안긴 남자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 떨었다. 질척한 타액이 이어진 채로 입술이 떨어졌다. 흥분으로 벌개진 눈은 이미 이성이 날아간 뒤였다. 그는 힘들어 보이는 표정과 지친 숨을 할딱이며 제 엉덩이 위에 있던 하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 꽉, 쥐었다.




“…나는요, 일 년 내내…발정기래요….”


그것은 토끼. 토끼의 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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