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황제가 죽었다.

 

일찍이 예견되었던 죽음은 그리 놀랍지도 않았으나 한 나라의 위신(威信)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적에는 응당 그만한 파장이 있기 마련이었다. 대륙은 흐느꼈다. 하필이면 삼일 밤낮으로 내리던 봄비로 땅도, 세상도 축축할 때였다. 안타까운 눈물은 흘러, 흘러 강물을 불렸다. 곧 눈물의 자취는 씻은 듯 사라졌다. 애석하지만 져버린 태양은 역사의 기록, 그 이상은 될 수 없었다. 죽은 이의 한계는 썩어 없어질 몸뚱이 뿐이다. 황제는 영면에 들었다.


경염은 내리는 비를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일정한 소리에 비해 미끄러져 내리는 빗물은 예측도, 정의도 내릴 수 없었다. 그것이 곧 제 운명이었다. 부황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사내에게는 이슬비가 몰고 올 태풍이 더욱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


부황에 대한 마음은 효심이라기보다는 연민에 가까웠다. 평생을 제 앞가림밖에 하지 못하던 사내. 공산당과 민주당 사이를 오가며 나름의 힘을 기르려 했지만 현대의 황실에서는 황권이란 금박지나 다름없었다. 보기에는 아름답고 화려하나 황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국법에 의거, 어디에도 쓰일 수도 없는 종이쪽지 신세였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로 완전히 맥이 끊긴 줄 알았던 황실의 핏줄 중 놀랍게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부의의 삼촌으로, 그가 난리 통을 피해 숨은 곳은 당시 막 힘을 일으키던 천지회(天地會)였다.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천지회는 청나라 황실에 가장 반기를 들었던 세력이었으니 아무도 생존한 황족이 그리로 숨어들었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살아남았다.


그가 어떻게 천지회를 설득했으며 또 살아남았는지. 살아남은 것으로도 모자라 후손을 보고 황실의 핏줄을 존속시켰는지. 그에 대해선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훗날, 삼합회가 된 천지회가 민주당 세력을 결탁하는 과정에서 황실을 부활시키는 초목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대륙의 황실은 현대에 이르러 부활했다. 공산당과의 오랜 암투와, 그에 따른 정치적 희생. 반대로 수많은 국민들의 지지와 또한 황족은 결코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그리고 어제, 황제 소선이 죽었다.

 


슬픔을 가장하는 얼굴들 뒤로 무슨 생각과 계산이 오고 갈지는 뻔했다. 경염은 그것이 퍽 덧없고 기구하단 생각이 들어 오히려 눈물을 삼갔다. 설령 슬퍼한다 한들 그 마음은 3일이면 족하다. 바꿔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만 다 하면 되는 것이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었다. 모두의 관심사는 한결 같았다. ‘다음 황제는 누가 될 것인가.’.


황실은 실질적 권력을 누리진 못했지만 황족을 기반으로 내려 온 유구한 역사에 기반 하여 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 공산당, 혹은 민주당과 결탁하여 뒤에서 힘을 부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쨌거나 세계를 좌지우지 한다는 중국 대륙의 황제였다. 투표로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능력이 출중하다고 앉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닌, 황실의 핏줄을 이어 받아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 탐을 내는 것은 당연했다. 경염도 그 중 하나였다.


삼일장이 끝나고 나면 목반(木盤)이 개봉될 것이다. 황실의 목반은 평범한 나무그릇이 아니다.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의거, 그 안에는 선대 황제가 남겨놓은 후계자의 이름이 적힌 서신이 들어있었다. 즉, 황태자의 존함이자 다음 황제가 누구인지를 지목하는 교지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태양의 자리를 두고 그 소생들의 칼부림으로 시끄러웠던 황실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애초에 당쟁‧황권 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손을 써 둔 이 방법은 현안이라 볼 수 있었다. 목반 안에 들어있는 교지는 황제가 내린 최후의 명령이자 사후에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이었다.


유력한 태자로 지목되었던 기왕이 8년 전 돌연사 한 이후로 황제의 선택이 누구로 향할 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귀추가 주목되던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 손꼽히는 것은 예왕이었는데, 그는 정치에 관심이 많을뿐더러 벌써부터 많은 정치 인사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왕의 황권에 대한 욕심은 그릇부터 남달라,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은 진작부터 싹을 제거했다. 따라서 다른 황자들은 15세가 되기 전에 황위 계승권을 포기함으로서 스스로 순위에서 물러났다.


 

그렇다면 남은 자는 오직 하나, 정왕뿐이다.

 


황족이라 할지라도 열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는 모후의 집안인 사가(私家)에서 지낼 수 있다는 법례에 따라 그는 광저우에서 자랐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을 함으로서 황권에 대한 뜻을 보이지 않아 예왕을 안심시켰다. 실제로 정왕은 황권에 대해 큰 욕심이 없었다. 자신의 길이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8년 전, 친형처럼 따르던 기왕이 죽고 난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황실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목반을 개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귀환을 두고 시끄러웠던 것도 벌써 8년 전의 일. 돌아 온 그가 보인 활동은 너무나도 미비했다. 애초에 기반이 약하고, 모략이나 권모술수에는 뜻이 없는 성정 탓에 곧이곧대로 올바른 길만 걸었기 때문이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 법이다. 예왕조차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돌아오질 않았다면 그가거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부로 모든 근심과 구설수는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실제로 기왕이 죽은 이상, 다음 황제는 예왕이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드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예왕은 유일하게 7류 면류관을 하사 받은, 죽은 선황이 가장 총애하던 황자였다.

 

“……이건, 도대체…?”

 

언론의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증인이 될 현경사의 관계자와 공산당, 민주당의 각 대표들. 그리고 황실 가족들만이 모인 자리였다. 드디어 개봉이 된 목반을 앞에 두고 순간 죽은 듯 침묵이 감돌았다. 곧 좌중이 술렁거렸다. 예왕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는 동안, 정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개봉 된 목반을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목반은 텅 비어있었다.

 







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SEOBANG (書訪)






 

황실이 발칵 뒤집혔다. 황실뿐만이 아니다. 정치판 역시 크게 술렁거렸다. 황제의 즉위식은 앞으로 15일 뒤. 그 전까지는 언론 등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이 법례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온 나라가 이 일을 두고 시끄러웠을 것이다.


목반이 비어있다니. 이는 과거에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일을 도맡았던 현경사의 담당자, 하동은 분명 선황이 교지를 안에 넣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교지를 빼돌렸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일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예왕부였다. 예왕을 비롯한 예왕부 측 인사들로서는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격이었으니 그 울분이 상상할 만하다. 예왕은 어떻게든 범인을 찾아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현재로서는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이 주 남짓. 그 전에 황제의 교지를 찾거나,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새로운 법을 제정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들이 오갔다. 목반을 개봉한 지 불과 12시간만의 일이다.

 






“……알았습니다. 내가 그리로 가겠소.”

 

정왕, 경염의 목소리는 크게 높낮이가 없었다. 그는 잘 웃지 않는 사내였고 우는 모습은 더욱이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놀라지 않는 사내였기에 부황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이런 중대사가 일어났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번 교지 실종 사건을 두고 그를 범인이라 추측하는 무리들도 적지 않았다. 교지가 사라진 마당에 가장 수혜를 입을 이는 누가 봐도 경염이었기 때문이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오늘은 지하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공식적으로는 회의에 참석하시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2시간 남짓 밖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오래 걸릴 이야기는 아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움직임은 은밀하지만 촉박했다. 외부로 이어지는 지하 복도를 통해 밖으로 나가자 검은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상대측에서 보낸 것이다. 린신. 그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사내였다. 경염이 올라타자마자 차는 출발했다.


진한 썬팅 덕에 유난히 어두운 차창 너머의 경치를 바라보는 표정이 고요했다. 그는 하루아침에 태풍의 눈 속으로 던져졌지만 그리 놀라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그에게도 시간이 촉박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하루도 잊지 않은 잔상이 머릿속에서 불길이 되어 훨훨 타올랐다.


눈이 오던 날이었다. 하얀 눈이 오는…….


기왕 형님이 죽은 지 3일 째 되던 날. 삼일장도 다 치루기 전에 그의 사가였던 저택이 불길에 휩싸였다. 경염은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 불길이 앗아간 수많은 것들 또한 잊지 못한다. 누구보다 올곧고 선하던 형님과의 추억, 배움을 얻었던 커다란 서재와, 봄이면 만발하던 장미 정원. 근처의 호숫가. 그리고….

 


……수, 임수. 너를.

 


회상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차가 멈췄다. 경염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올랐던 것처럼 은밀히 내렸다. 주변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적막.


“어서 오십시오. 정왕 전하.”

“반갑소.”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물 흐르듯 자신을 지나치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린신이 소리 없이 헛바람을 삼켰다.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차갑기로는 서릿발이 그지없는 사내가 아닌가. 린신은 곧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는 길었고 조명은 침침했다. 사업자 등록까지 마친 완벽한 회사의 빌딩이었으나 그 내부는 책상은커녕 텅 비어있었다.


소유주는 린신. 삼합회(三合會)의 관리 하에 있는 건물이었으니 여러모로 치외법권인 셈이었다. 그곳에서만 벌써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이런 수상한 건물의 내부를 거침없이 누비는 경염의 발걸음이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삼합회와 황족. 둘의 기묘한 만남은 비밀에 부쳐져야만 했다.

 

“상의할 것이 있어 급하게 보자고 했소. 어제….”

“목반이 텅 빈 채로 발견된 일 말입니까?”

“……….”

 

분명 관계자 외에는 절대 함구령이 내려졌을 텐데. 경염의 미간이 좁아졌다. 과연 린신. 이 넓은 대륙 땅, 그 어디에도 삼합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없다고 들었다. 그런 삼합회 내에서도 무려 중간 수뇌부까지 올라간 남자이니 이 정도의 정보력은 놀랍지만 당연했다. 14K단이라고 했던가…. 경염은 린신의 소속을 외워두려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눈앞의 사내를 두고 ‘산쥬’라 부른다는 것까지도.

 

“예왕이 난리가 났겠군요. 어찌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흥미롭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당신은 모르는 일이란 말인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하는 삼합회라 한들 어찌 황실 내부까지 손이 미치겠습니까? 오해하고 계셨다면 지금 의심을 거둬주시길. 어쨌든 칭찬이라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칭찬? 경염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능구렁이 같은 사내같으니라고. 생각하는대로 입에 담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모로 봐도 둘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이젠 한 배를 탄 입장이니 서로 묵과하고 넘기는 부분도 분명 있어야 했다. 경염은 접대 차 내온 모란차에는 일절 손도 대지 않은 채 오직 눈앞의 사내에게 집중했다.

 

“일단 알아 보겠습니다. 저로서도 궁금하니까. 누가 그리 대담한 짓을 벌였는지 말입니다.”

“그럼 그 부분은 믿고 맡기겠소.”

“원래대로라면 예왕이 적혀 있었을 교지일 테고…. 그가 태자로 지목이 되었다면 즉위식 당일에 일을 진행해 보려고 했는데, 이거 원.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음모가 있는 건지.”

“천운인지, 악행인지 나로써도 모호하오.”

“어쩌겠습니까. 본디 천자(天子)란 하늘이 내리는 이인데.”

 

린신은 껄껄 웃었다. 매사 태평해 보이는 유유자적한 태도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한 뒤로 저만 아는 비밀을 감추고 있을 것 같아 때때로 경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경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을 깜박이는 일은 있어도 시선을 피하거나 다른 곳에 주는 법은 없었다. 그 올곧은 시선은 늘 바르고 강직했다.


린신 또한 그런 점이 정왕의 강점이자 단점이라 생각하던 중이었다. 세상의 물고기들은 진흙탕 속에서만 헤엄치고 있으니 맑은 물이 고여 있어도 그것이 맑은 줄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저 맑은 물에 어떻게 분탕질을 쳐 놓느냐, 하는 것이었다. 린신은 씩 웃곤 내내 쥐고 있던 접선(摺煽)을 크게 펼쳤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계획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 둔 것이 있단 말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천자란 무릇 하늘이 내리는 이. 그러나 하늘이 응답해 주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뭣보다도…하늘이 매번 옳은 선택을 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나는 말을 돌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

 

딱 부러지게 말을 자른 경염의 말에 린신은 펼쳐 든 부채 너머로 씩 웃었다.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은 여간 타는 것이 아닐 테다. 몇 년 전부터 준비해오던 계획이 틀어져 버렸으니 제 아무리 제갈공명이 되살아온다 한들 당황하기 마련. 린신으로서는 저 청아한 사내가 제 손을 잡았을 때부터 이미 살면서 놀랄 것은 다 놀라버린 터라 더 이상 놀라울 것도 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의 호숫가처럼 잔잔하기로 정평이 난 사내였다. 황위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그런 그가 왜 황실로 돌아왔는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쏘시개를 들이대기도 전에 그 속에는 이미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이 꽈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이 이무기가 될지, 혹은 용이 될지. 패는 열어봐야 알 것이다.

 


“15일 후에, 전하께서는 황제의 보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겨우 내보인 눈이 샐쭉 웃었다. 역시 속을 모를 사내다. 한쪽이 돌처럼 다부진 사내였다면 다른 한쪽은 바람처럼 자유자재로 나부끼는 남자였다. 둘은 성정만큼이나 방법 또한 너무나도 달랐다. 경염은 분명하지 않은 과정이 싫었다. 반대로 린신은 결론이 확실치 않으면 아예 입밖에 꺼내지를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경염이 다시 한 번 그에게 반문하려던 차였다. 알고 싶은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었다.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는 지를 설명할 구체적인 방안 말이다.

 

“그 전에, 소개해 드릴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는 린신이 선수를 쳤다. 경염은 끓는 속을 삼키며 하려던 말 역시 함께 삼켰다.

 

“그리고 이미 여기 와 있지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급적이면 서둘러 주시오. 내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소.”

“미리 말씀드리자면, 곤(坤)족입니다.”

 

곤족? 경염의 눈썹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꿈틀거렸다. 곤족이라면 중국의 수많은 소수 민족들 중 하나로, 이제는 그 존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라져버린 일족(族)이었다. 곤족은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사람을 홀리는 향기를 갖고 있다 하여 종종 경국지색의 본(本)이 되기도 했다. 실제로 양귀비 역시 곤족이었다는 설이 낭설처럼 떠돌곤 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자들. 그렇기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 이제는 역사 책 어디에서도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는 잊혀진 종족 중 하나였다. 그러나 경염은 곤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러니 부디, 홀리지 마십시오.”

 


곤족이었던 이를 한 명 알고 있었다. 경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꽉 쥔 주먹 안은 벌써부터 긴장이 역력했다. 드문 일이었다. 경염은 생각을 고쳤다. 아니다. 그일 리가 없다. 알면서도 한 번 떠오른 이름은 내내 뇌리를 맴돌았다. 문득 코밑을 스치고 지나간 싱그러운 향기. 그렇다. 너도, 곤족의 후예들 중 하나였다. 사람을 홀리는 요망한 존재들이라는 이유로 모두 짓밟히고, 멸시받은 가운데서 겨우 살아남은, 어쩌면 유일한.

 



꽃.

타 죽어버린, 꽃.



 

“그만 나오거라. 전하께서 뵙고 싶어 하신다.”

 

떨쳐내려 하면 할수록 생각은 넝쿨처럼 뿌리를 내린 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나갔다. 그러다가 겨우 멈췄을 때에는 이미 문이 열리고 난 뒤였다. 경염의 시선은 열리는 문 너머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이름 한 자 듣지 못했음에도 운명 같은 호기심이 그를 붙들었다. 홀리지 말라 했던가? 그렇다면 이미 틀렸는지도 모른다. 한 번도 깜박거리지 않은 눈길이 온통 그곳에 쏠려있었다.

 

“…전하, 인사드립니다.”

 

어쩌면 그대로 박힌 건지도 모른다. 푹 찔린 곳에선 피 한 방울 솟지 않았지만 경염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내리 깐 속눈썹으로 뒤덮여 있는 아래의 눈동자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의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이미 제가 알고 있던, 일찍이 죽어버린 이가 아니라는 것을 방금 제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매장소라 합니다.”

 


기필코 눈이 마주쳐버린 순간, 알았다.

눈앞에 핀 것은 꽃.

 




휘덮인 설원 중 홀로 지독한 붉음을 자랑하는,

매화.





…홍매화(紅梅)다.

 










/@SEOBANG



3주 정도 고민하다가 결국 연재를 시작합니다. 금릉의 봄에 데리고 갈 글입니다:)

정왕종주/정매로 현대 황실 AU를 기반으로 합니다.


수위 높은 내용을 포함할 예정이기 때문에^^; 포스타입과 네이버 블로그에 동시 연재합니다.

네이버 블로그의 경우 높은 수위가 포함된 내용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걸 제가 정말 써도 되나 싶습니다만...(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잘 부탁드립니다(__)



 본 소설은 역알못에 의해 말도 안되는 판타지적 설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EX 중국의 현대 황실) 이에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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