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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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기어코 찾아오는 아침은 그가 눈을 떠야 할 시간임을 알렸다. 아무리 밀어내도 다시 밀려오는 파도처럼, 영겁 같던 시간이 어제부로 막을 내린 참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방 안이 어쩐지 낯설어 매장소는 가만히 눈을 떴다가, 또 감았다가. 의미 없는 눈짓만을 반복했다.


사실 그 외에는 좀처럼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이나 그를 받아냈는지 모른다. 수를 헤아리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생각하기를 관둔다. 멈추지도, 끝나지도 않는 섹스에 그야말로 부서지는 줄로만 알았다. 저를 파고드는 것은 그의 분노였고, 시기였고, 괴로움이며, 끝내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독(毒)이다.

저에게는 독. 독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매장소는 허전한 옆자리를 더듬었다. 없는 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매번 기대를 하는 것인가. 눈을 떴을 때 그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임수는 행복했을 것이다. 경염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주었으니. 허나 매장소는….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는다. 한 번 터지고 나면 멈출 도리가 없어 저만 곤란해 질 것이다. 여태껏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눌러왔다.




‘사실 황제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소.’

모든 것이 끝난 새벽녘. 그는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은 죽은 기왕 형님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힘이 없는 목소리였으나 머뭇거리진 않았다. 녹음된 테이프처럼, 나른하게 흘러나왔다.



‘……내 정인을 위해서이기도 하오.’



격정적인 정사(情事)의 흔적은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어느덧 말라버린 몸이 시트 위로 그대로 푹 꺼지는 것을 느끼며, 매장소는 경염의 고백을 듣고만 있었다. 정인(情人). 한 번도 직접 말해준 적 없던 이름으로 저를 부르니, 그것이 퍽 낯간지럽고 슬펐다.


그리 생각하고 있었구나. 자신 또한 다르지 않았지만 이젠 모두 지난 일이기에 생각조차 않으려 했던 것이 어쩐지 미안해졌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웃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찰나일 뿐. 남자가 보지 못하게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에서 전라의 몸을 둥글게 만 채로. 어떻게든 제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몸짓은 처연했다. 와중에도 혹시나 흐느낌이 튀어나갈까 깨물고, 깨문. 입술이 아렸다.



‘나는……. 당신을 만나지 말아야 했을 지도 모르겠소.’



아려서, 아파서. 괴로웠다.



매장소는 가만히 제 눈을 가리는 것으로 생각을 멈췄다. 눈물을 참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그러고 가만히 있으면 어느덧 눈물은 자취를 감추곤 했다. 그럴 때엔 꼭 주문을 함께 외워야 한다. 너는, 매장소야. 너는, 임수가……아니야. 봉오리도 채 틔우지 못하고 죽은 그 소년이 아니다. 그는 이미 정인과의 추억을 껴안고 함께 화장(火葬)당했다.


몸을 일으켰다. 경염은 그렇게 훌쩍 떠난 뒤로 아무 소식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지는 않으려나. 얄팍한 희망이 주제도 모르고 고개를 든다. 이제는 정말로 대업을 생각해야 할 때, 거추장스러운 과거는 일부러라도 떼어놓고 앞일을 도모해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설령 독이라도 못 삼킬까. 매장소는 나풀거리는 비단 가운을 걸친 채로 제 머리를 질끈, 동여 묶었다. 알고 있다. 경염은 결코 어젯밤을 없었던 일처럼 여기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욱, 제가 아무렇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발견한 순간.



쿵, 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끝도 없이 떨어지는 희망이 저 밑바닥에 닿자마자 와장창 부서져버렸다. 이게…무슨. 두 대의 핸드폰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경염의 것이다. 그가 놓고 간 것이다. 매장소는 예감했다. 실수로 흘린 것도 아니고, 혹시 몰라 두고 간 것도 아니다.



그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침묵. 그 어느 때보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죽은 이보다 싸늘했다. 이런 순간에조차 억지로 웃을 마음 따윈 없었다. 그런 거짓된 미소로 가장하고 있기에는 벌써 부서진 마음이 가엽지 않은가. 나란히 놓인 두 대의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매장소가 숨을 들이켰다. 살아있는 몸뚱이가 가끔씩 낯설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 제가 살아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살아서, 이토록 괴로워야 한다는 사실이.


홀린 듯 멈춰있던 시선이 비로소 정면을 향했을 때, 그는 거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얼굴은 제가 아니다. 임수가 아니다. 임수일 수 없다. 몇 번이고 뇌까리던 주문이 흥분으로 고조되는 순간. 매장소는 옆에 놓여있던 가위를 집어 들었다. 턱 하고 낚아 챈 손길이 평소와 달리 날래고, 힘찼다. 망설이지 않기 때문이다. 벌어진 가위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싹둑, 잘라냈다.




긴 머리가,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종주…종주님? 이게 대체 무슨…!”

화들짝 놀라 달려 온 사람은 건평이었다. 그는 바닥에 흩어 진 주군의 머리카락에 그만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서성거렸다. 가위를 들고, 오직 침묵으로 일관하는 매장소의 주변에는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가 번져있었다. 예로부터 곤족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머리를 자르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건평으로선 이게 무슨 사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침만 꼴깍 삼키며 매장소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기다렸다. 아무리 매장소의 바로 곁을 지키는 그였기로서니,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고 또 제 주군의 심사(心思)가 어떠한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 있던 건평의 뒤로, 한 발 늦은 비류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종주의, 주군의 머리가 몰라보게 짧아져 있었다.



“어제 전하를 안으로 모신 것이 누구지?”
“아, 저, 그게…….”

매장소의 갑작스런 질문에 일단 놀란 얼굴부터 좌우로 털어낸 건평이 곰곰이 생각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궁우가 방에 있었다. 전하를 뫼시지 않았다는 소리다. 일전에 기희들을 함께 들여보내 종주에게 크게 혼난 뒤로는 어쩐지 그 일을 꺼려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누가 갔더라…. 건평 역시 어제는 일이 바빠 랑야관을 돌보지 못했다.

“궁우가 아니군. 그렇지?”

매장소는 경염을 모시는 일에 궁우 외에게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하물며, 어제 정왕이 어째서 방 뒤에 있었는 지도 의문이다. 밀방(謐房)이라 하여 숨겨진 방 중 하나였다. 몰래 엿듣거나 잠복이 필요한 경우에나 쓰이는 것이지 요즘에는 문을 열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 곳에 경염이 있었다. 필시 누군가가 그를 거기 데려다 준 것이다. 매장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런 짓을 할 자라면….

“어제, 예왕과 함께 진반약도 왔는가?”
“예, 그렇지요. 두 사람은 보통 동행하니 말입니다.”
“그녀의 짓이로군.”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자는 한 명 뿐이었다. 진반약. 그녀 또한 곤(坤)족의 후예 중 하나였다. 곤족이 몰살당하기 십여 년 전, 제 아버지와 뜻을 달리 한 선기낭자를 따라 이미 마음을 떠난 곤족의 여인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정치 풍파에 휘말리다가 결국 일찍 세상을 떠난 선기낭자의 유지를 이어받아 현재의 홍수초(紅壽哨)를 이끌고 있는 실질적인 리더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예왕부에 들어가 충성을 맹세한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뜻이 다르다 해도 곤족의 후예라는 점을 감안하여 지금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눈감아주고 있었다.


매장소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제가 임수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곤족의 수장이었던 아버지, 임섭과 선기 낭자 사이에는 깊은 허물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녀의 언니인 영롱과 혼약을 맺던 해에 선기낭자는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곤족을 떠났다. 애초에 서로 가진 뜻이 달랐다.


곤족의 평화를 중히 여겼던 아버지와, 온순한 성정의 어머니와는 달리 그녀는 남들 모르게 숨어 살다시피 하고 있는 곤족의 현실에 줄곧 개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보기에는 이십대에 불과한 나이처럼 보이겠지만 예로부터 쉬이 늙지 않는 곤족의 특성 상 진반약의 나이도 이제 마흔을 웃돌 것이다. 지나온 세월은 짧지도, 녹록치도 않았던 만큼 그녀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쉬이 판단해서는 안 된다.


제가 임수라는 것은 몰라도 곤족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의 몸에서 풍기는 내음만으로도 그가 곤족인지 아닌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터. 제가 정왕의 편에 섰다는 것을 알고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함이다. 그렇다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당장 하룻밤 사이에 두 사람은 파국을 맞이했다.

“외출할 테니 채비를 해.”
“그, 종주. 그런데 어째서 머리를…….”

그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갑작스런 매장소의 변화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건평의 질문에 매장소는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 그에게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질문에 답해 줄 시간은 더더욱.




“정왕부로 갈 것이다.” 




임수가 아닌 매장소로, 그를 만날 것이다.









태어나 이토록 짧은 머리를 한 적이 있었던가. 머리카락을 자름으로서 매장소는 지난 추억과의 구구절절한 연을 모두 끊어버렸다. 마음이 흔들리다니,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죽은 기왕과 아버지는 원래 서로 알던 사이였다. 기왕이 먼저 접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변화하는 세계에 발맞추어 새로운 중국을 꿈꾸는 사내였다.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숨어 살다시피 하던 전설의 곤족을 찾아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린 재자를 얻는 자, 천하를 얻으리라.’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전설의 ‘랑야방’에서 선정하는 5대방에 모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곤족뿐이었다 하니 그들이 갖춘 재색과 문무는 한때에는 천하제일이었음이 자명했다.


그러나 너무 뛰어난 자는 지탄 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 곤족은 차츰 역사에서, 전설에서 자취를 감췄다. 늘 태풍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들의 운명이라 했다. 그럴 바에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겠노라고. 이미 그리 결정한 선조들에 의해 작은 마을을 꾸려 일생을 평화롭게 보내다 가는 것이 저들의 삶이었다. 분명 그러했다. 그날 밤, 총칼을 앞세워 들어온 무뢰배들이 아니었다면.


민간인의 습격이라 보기엔 그 움직임이나 규모가 지나치게 조직적이었다. 제복과 군화. 군대였다. 누군가 곤족을 몰살하라 보냈음이 틀림없다. 그날은 기왕이 와 있던 날이기도 했다. 다른 일 때문에 들렸겠지만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아직도 어린 제 등을 떠밀며 어서 도망치라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마지막에 건네 준 은장도가 아비의 유품이 되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서…너를 지켜야 해.’
‘……그 누구에게도 너를 주어서는 안 된다. 수야. 알겠느냐.’




타오르는 불길에 견디지 못한 기둥이 무너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겼다. 화염으로 불타는 강. ‘어서 가거라, 어서!’ 평생 호통 한 번 치는 법 없던 아버지의 목소리에 떠밀려 기왕의 손을 잡고 달렸다. 아버지는 결국 거기서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곤족의 대부분이 자신들의 평화롭던 마을에서 죽었다.


그날 이후로 기왕은 곤족에게 더욱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본디 억울한 일에 그냥 눈감지 못하는 사내였다. 그를 말렸어야 했다. 그가 곤족의 사건을 입에 담지 않도록 말이다. 언론에서조차도 입을 다문 일을 제 1황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놀란 것 뿐 아니라 누군가는 그를 죽여 이 일을 아주 덮어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이 일로 그는 황제의 눈밖에 아주 나게 됐고, 결국엔 죽었다. 곤족 때문이다.


그는 다정한 사내였다. 자신이 늘 사가에 머무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어린 임수를 보호하기 위해 무던 애를 쓰기도 했다. 어린 임수도 그랬어야 했다. 그를 말리지 못한 것, 어린 마음에 망설였던 것. 그것이 여태까지도 마음의 추가 되어 무겁게 짓누른다.



그러니까 정왕, 정왕만은. 지켜야 한다.
이는 임수로써가 아니다, 매장소로써이다.



황궁부로 들어가기까지는 여러 절차가 필요할뿐더러 드나드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허락된 이들에게는 평범한 건물, 평범한 입구에 불과했다. 매장소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정왕의 측근인 열에게 전달되었다. 곧 문이 열렸다.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전하께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열은 아직 어제의 파경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거의 밤새도록 랑야관에서 보내다 갔으니 딱히 저를 의심할 구석도 없었다. 덕분에 정왕부의 건물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밖은 여러모로 보는 눈이 많으니 이 편이 훨씬 나았다. 매장소는 호흡을 가라앉혔다.


역시나,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가슴은 욱신거린다. 따라 나선 건평도 초조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행여나 그가 쓰러져버릴까 하는 걱정은 언제 어느 때고 해야만 하는 의무였다. 거기다가, 매장소의 낯빛이 좋질 않다. 시기가 봄인 것은 천만다행이나 계절에 상관없이 그의 몸은 늘 허약했다.

“……종주, 전하께서 만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다시 전해주세요.”
“만나지 않을 것이니,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진짜 난관은 지금부터였다. 경염의 고집을 모르는가? 아니다. 한 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굽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만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만나야 한다.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했다. 사실 고집으로 치자면 저 역시 만만치 않았다. 허니 만날 수밖에 없게 하겠다.



“다시 전해주십시오.”



차분한 척 가장하는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서, 그것만이 애석할 뿐이다.
다른 사람은 모두 속여도, 저만은 속일 수 없어 어리석고 걱정될 뿐이다.


그리하여 너를, 네가. 알아차리게 될 까봐.




“임수가 찾아왔다고 말입니다.” 




쓸 수 있다면 무슨 패이든지 꺼내야지. 그것이 설령 떠올리는 순간, 순간마다 눈물 나는 풋정이라 할지라도 필요하다면 그리 해야지. 이는 임수는 할 수 없는 방법이다. 매장소이기에 가능한 방법. 그는 비로소 침착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를 기다렸다. 확신한다. 다시 저 문이 열릴 적에는 경염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



보고 싶었다.
나는, 늘 네가 보고 싶었다.



“도대체 임수란 자가 누구기에 정왕 전하를 이토록 쥐고 흔든단 말입니까?”

경염은 떨리는 시선을 가눌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저버린 지 오래였고 지금은 오롯 눈앞의 남자에 대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다. 분명 제 입으로 모든 것을 실토했다. 그럼에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채 문을 열었거늘, 보이는 사내가 너무 낯설어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짧게 정돈한 머리와 검은 수트 차림은 자신이 알던 매장소가 아니었다. 경염은 이 충격이 익숙했다. 이전에도 겪은 적 있기 때문이다.

“모두 물러나라.”

한 마디에 남은 것은 또 다시 둘, 둘뿐이었다. 매장소는 웃지 않았지만 울지도 않았다. 어쩌면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핸드폰을 두고 나왔으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벌써 알아차렸을 터. 그래서 여기까지 발걸음 했단 말인가? 경염은 전에 없는 얼굴로 매장소를 바라보았다. 둘의 온도는 격렬했던 어젯밤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소.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오.”
“그토록 쉽게 저버릴 수 있는 대의였다면 애초부터 왜 마음에 품으셨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매장소의 질문에 경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용인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 그대가 나를 기만하려 하는가?

“어찌 다른 이의 핑계를 대신단 말입니까? 그리 쉬운 일처럼 보이셨습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죽은 기왕 전하가 펼치지 못한 뜻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께서 어찌 이리 일을 쉽게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닥치시오!”

그는 모른다. 제 속을 모를 것이다. 더는 그런 자가 함부로 떠들게 둘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른 경염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평생 누군가에게 이토록 강렬하게 감정을 표현한 적이 있었던가. 여러모로 그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할뿐이다. 경염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들이킨 숨을 고르려 했지만 여전히 속에서 들끓고 있는 시커먼 것들이 비죽한 날을 세우고 저를 찔렀다. 그것이 아프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8년을 살았다.

“…나에게는, 나의 방법이 있소. 일을 포기하겠다는 뜻이 아니오. 그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말을 마친 경염은 돌아섰다. 돌아서면서도 알았다. 이것은 도망이다. 도피에, 불과하다.



“경염!”

가던 걸음이 멈췄다. 꼼짝없이 묶여버렸다. 고작 저 사내가 부르는, 제 이름 하나에.



“……제발 가지 말라했던 건, 전하십니다.”



그렇다. 제발 가지 말아 달라 했다.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고. 모두 다 자신을 떠난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사내에게 호소했다. 남자는 그를 붙잡고 흘릴 눈물 대신 저를 다 쏟아 부었다. 하지만……. 잃고 싶지 않기에 갖고 싶지 않은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 빠져나갈 것들이 두렵기 때문이다.


경염의 주먹이 눈앞의 문을 내리쳤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이미 젖은 눈동자가 끝까지 울지 않은 것은 다행인 일이나 서글픈 일이기도 했다. 눈물을 참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습관이 되고 곧 신념이 되었다. 울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왕 형님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내 정인을 위해서 라고도 분명 말했소.”

이젠……울지 못한다. 그는.



“허나, 당신을 보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차라리 고통스럽기를 택했다.



경염을 내내 괴롭히던 사실은 그가 임수를 배반했다는 것이다. 소년을 저버렸다. 무어라 변명을 해도 그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 풀내음을 채 지우지도 못한 주제에 그 위로 붉은 매화를 덧칠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생은 여전히 혼돈 한 가운데에 있었다. 스스로를 붙잡는 것에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내를 내치는 일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잡기 위해선 또 무언가를 놓아야 한다. 그것이 경염이 생각하는 이치였다.


다시 그를 바라봤다. 새빨개진 흰 자위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눈물을 참고 있는 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매장소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고 남자의 슬픔과 정면으로 마주 선다.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다.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제 어린 날에 대한 애도이다.


“……저는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떠날 것입니다.”
“……….”
“전하의 인생에서, 한낱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아.
나는……괜찮아. 경염.



“그래도……정녕 저를 내치실 겁니까?”



경염은 순간 그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왜. 그는 왜 이토록 이 일에 집착하는 것일까. 떠올랐던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지금은 생각 대신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한 번 번복한 선택이기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경염은 숨을 삼켰다. 이제 남은 날은 고작 8일.




“……따라오시오.”

경염은 닫혔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열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비키는 동안 그의 걸음은 오로지 정면만을 주시했다. 정왕부의 내실, 그 중에서도 그의 서재는 가장 안쪽에 있었다. 이는 오롯 경염을 위한 공간임을 의미했으며 그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는 손길이 서재의 문을 열었다. 책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온갖 서적들은 마치 지난 날 소년이 즐겨 찾던 기왕의 서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매장소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뜩이나 찌를 듯한 두통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기왕 형님이 내게 남겨주신 물건이오.”

경염은 묵직한 책장을 옆으로 밀고 그 뒤로 보이는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서 꺼낸 것은 작은 나무 상자였다. …목반? 아니, 그럴 리가.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였다. 경염은 책상 위에 상자를 올려놓곤 가만 내려다보더니 곧 뚜껑을 열었다. 비단 안에 곱게 쌓여져 있는 그것.



“예왕이 황후의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요.”

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말라 비틀어 있었지만 매장소는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탯줄, 탯줄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




“예왕의 친모가 남긴 유일한 증거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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