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방 皇惹房

~15일의 기록~

11








검은 차가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화려한 정문에 비해 후문은 기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래부터 인적이 드문 곳인데다가 오늘은 골목 앞 쪽에선 가드들이 통행을 제한하니 갑자기 생긴 검문소에 사람들은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와중에 세단은 아무 무리 없이 골목 안으로 진입했다.조용히 차에서 내린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열리는 문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차 한 대가 더 도착했다. 이번에는 흰 차였다. 비까번쩍한 보닛 위로는 고가의 차량임을 증명하는 엠블런이 존재를 과시했다. 골목으로 진입한 차는 앞에 세워 진 검은 차 바로 뒤에 멈췄다. 뒷좌석에서 사내가 내리자 문을 열어 준 운전기사가 황급히 차량 번호판을 가렸다. 사내의 신분을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예왕 전하.”

먼저 와있던 사내가 손님을 반기고 상대 또한 가벼운 고갯짓으로 그에 응했다. 기다리고 있던 자는 하강. 현경사의 수장인 사내이다. 당파나 정쟁에 휘말려서는 안 되는 현경사, 동시에 황궁 내무부의 수장이기도 한 그가 이 늦은 시각에 ‘홍수초’의 은거지 까지 발걸음 한 까닭은 무엇인가. 비단 오늘의 걸음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안색이 안 좋으시구려. 고민이 많나 보오.”
“그렇다한들 전하의 근심에 비할 길이 있겠습니까.”

썩 듣기 좋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두 사내에게는 그것이 안부 인사나 다름없었다. 골머리를 썩기로 치자면 예왕에 견줄 자가 있겠냐마는 불과 며칠 사이 폭삭 늙은 듯한 하강의 얼굴도 변변찮긴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두 황자가 소집되었던 저번의 인민 공화국 대 회의 이후로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먼저 연락을 취해 온 것은 하강이었고, 그 심부름은 진 반약이 도맡았다. 한 명이라도 더 힘이 필요했던 예왕으로서는 반가운 인사였다. 하물며 현경사의 수장인 하강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당쟁에 끼어들지 않기로 유명한 자인데다가 황궁부에서는 가장 실권을 쥐고 있는 남자가 아닌가. 곧이어 조용히 열리는 문 뒤로는 반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써 모일 사람은 전부 다 모였다.

“어찌하면 좋겠소? 정왕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심상찮소.”
“저번에는 무려 교지를 찾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그가 교지에 손을 댄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만.”
“내 생각도 그러하오. 설마 정왕이 교지에 손을 대거나 하진 않겠지.”
“교지는 위조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을뿐더러 한 번 열고나면 그 흔적이 남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떤 수를 쓰든 제가 감별할 수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겝니다.”

대화를 나누는 것은 주로 두 사람의 몫이었고 반약은 뒤에서 듣는 것이 전부였다. 가끔 나설 때도 있었지만 묻는 질문 의외에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반약. 정왕 쪽은 어떻게 되었느냐?”
“역시 매장소와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가 정왕 뒤에서 일을 부추긴 듯 합니다.”
“허, 이거 정말. 깜박하면 속을 뻔 했구나. 네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모를 뻔했다. 그래, 그럼 정왕과 매장소는 확실히 갈라선 것일 테지?”
“정왕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앞으로는 혼자 행동하지 않을까요. 매장소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반약은 싱긋 웃었다. 붉은 립스틱이 입 꼬리를 따라 함께 올라갔다.

“매장소? 매장소라면 랑야관의 주인이 아닙니까.”
“그렇소. 나와도 긴밀한 사이였지. 이번에 대 회의에 황족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공산당을 움직일만한 비책을 준 것도 바로 그라오. 그래서 틀림없이 내 편인 줄로만 알았는데……. 깜박 속을 뻔 했지 뭐요.”

매장소. 이름이야 물론 들어본 적 있었다. 가무에는 일체 관심이 없는데다가, 당쟁에 휘말릴 일도 없었던 하강으로서는 정치 잡배들이 모이는 랑야관은 쓰레기 소굴, 그뿐이었다. 그러니 여태까지 마주칠 일도 없었고 앞으로도 연이 없을 사내였다. 하강은 문득 맘에 걸리는 이름이 의아했다.

“천하의 기린재자라더니. 다 헛말이었나 보오.”


……‘기린재자’?


하강의 시선이 순간 예왕 뒤에 있던 반약에게로 향했다. 둘의 눈이 마주친 것은 찰나였지만 서로 같은 말에 반응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소. 그럼 예정대로 한다고 알고 있으면 되겠소?”
“그렇습니다. 달리 방도가 없지 않겠습니까. 교지는 사라졌고, 황제의 자리는 핏줄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자리이니…. 순서대로 예왕 전하께서 올라가시는 것이 맞지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교지가 없으면 내 자리에 대해서 나중에라도 말이 나올 것 같아서 말이오. 정말 찾을 수는 없겠소? 현경사에서도 찾고 있는 것이 아니오?”
“어디로 사라졌는지 저희로서도 모르겠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허나 교지가 없어도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는 일만은 변함없는 사실일 테니 걱정 마시옵소서.”
“그대가 내 편이 되어주니 정말 마음이 놓이는구려.”

껄껄 웃음을 터뜨린 예왕은 내내 장식이나 다름없었던 위스키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반약이 재빨리 나서 그의 잔을 대신 채워주었다. 취할 생각은 없었으니 그저 입이나 축일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발걸음 했는데 이제 곧 헤어질 것이 아쉽기라도 한 양 예왕은 다시 병을 들어 앞에 놓인 하강의 잔을 채웠다.

“일이 다 끝난 후에는 어쩔 생각이오?”
“무엇을 말이옵니까?”
“정왕 말이오. 그냥 둬도 되겠소?”

예왕의 말에 하강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정왕. 어차피 도와주는 이 하나 없으니 그냥 둬도 끈 떨어진 연 신세겠지만 기왕과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던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후환은 미리 없애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무래도 멀리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오호, 외국이나 이런 델 말이오? 원래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 했으니 적당히 한 자리 줘서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술잔을 주욱 들이키는 예왕은 별 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허나 하강은 아니었다. 그 역시도 정왕을 멀리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아주 멀리, 어쩌면 이승에서는 갈 수 없는 곳까지.

“내일 회의가 기대되는구려. 모쪼록 힘써주시오.”
“예, 전하.”

은밀한 만남일수록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다. 길면 꼬리가 밟히는 법. 예왕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강은 그가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반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장소. 네가 말한 것이 확실한 것이냐?”
“네, 어르신. 그 또한 곤(坤)족임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제가 떠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런 이름을 가진 이는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모르는 자라고?”

가뜩이나 주름이 깊이 팬 얼굴이 홱 일그러졌다. 하나라도 잘못되거나, 그가 모르는 일은 없어야 했다. 예왕의 입에서 ‘기린재자’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하강의 신경은 온통 그곳에 쏠려있었다.


곤족. 이미 다 죽어 없어져야 할 후예들이 여태도 남아있단 사실이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게 누구이든 하강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그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그건 홍수초, 그녀들뿐이어야만 한다.

“헌데 병환이 깊어 오늘, 내일 하는 자라더군요. 정왕과의 관계도 끊어놨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너도 각별히 만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처리하란 것은 제대로 처리했느냐?”
“네, 어르신.”

얄쌍하게 쭉 찢어 올라간 눈매 아래로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녀의 붉은 립스틱이 기다렸다는 듯 매끄럽게 올라갔다.





“교지는 완전히 불태웠습니다.”








7일

회의는 모집될 때마다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정왕은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가 중화 인민 공화국 국회의원, 그 중에서도 대 의원들만 골라 앉혀놓은 것이 정녕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즉위식이 7일 앞으로 다가왔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뉘앙스부터가 애매하다. 아직 시간이 남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아주 촉박한 것 같기도 하다. 와중에도 경염만은 끊임없이 생각을 거듭했다. 그가 기다려온 세월에 비하면 일주일은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다. 지금도 당장 눈을 감았다 뜨면 즉위식이 펼쳐지고 있을 것 같은 착각에 그는 속으로 웃었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뚜껑 아래에선 무슨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제는 사뭇 기대가 되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정숙해 주시오.”

경염은 그들에게 조용히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한 회의장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한 가닥씩 잡고 있는 대 의원들이다보니 콧대로 말할 것 같으면 황족쯤은 저리 가라다. 결국 그들이 입을 다문 것은 의원장의 목각이 제 힘을 발휘했을 때다. 딱, 딱, 딱. 낯선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본능처럼 입을 다물었다. 기분은 썩 좋진 않았지만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교지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여태도 별다른 소식이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발언에 모든 시선이 경염에게로 향했다. 공격 개시인가. 경염은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겉모습만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길이 없는, 평온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정왕 전하? 분명 교지를 찾으실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상황이 급해지니 보이는 것도 없고 기억마저 온전치 못한 듯 하다. 찾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찾겠노라 호언장담을 한 적이 있었던가? 허나 그와 말장난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경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왕부도, 현경사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면 이를 어찌 할 겁니까? 즉위식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일주일! 이제는 목반이 사라졌다고 공개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어떤 수를 써서든 황궁 내에서 처리되어야 하는 일이 되었단 말입니다!”
“대체 누가 이 사태를 책임질 건지…. 대책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

하나같이 목소리를 높이는 공산당원들을 바라보며 그제야 경염의 눈썹이 조금, 기울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타깃은 자신인 듯 싶다. 그들 가운데서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사옥과 눈이 마주치자 예감은 좀 더 확실해졌다. 말이 좋아 바라본다는 것이지 노려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눈길에 경염은 마주 응시했다. 둥그렇고 커다란 눈동자는 무심하게 사옥과,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다.

‘분명 전하를 가만 두지 못해 안달할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쯤 되면 어느 쪽으로든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왕이 사옥에게 말을 전한 것이 확실하다면, 공산당원들은 입을 모아 전하를 비난하겠지요.’

이번에도 그의 말대로 되었구나. 거세어지는 비난의 화살이 제게로 쏟아지는 걸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경염은 와중에 매장소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것처럼 정확한 진단이었다. 들을 때에는 이게 정말 가당키나 한 일인지 의구심이 들었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니 이젠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

“언제 발견될지도 모르는 교지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대책을 강구해야 해요.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장자즉위제(長子卽位制)‘를 꺼내들 겁니다.’


“태어난 순에 따라 현재 장자이신 예왕 전하가 황위에 옹립하는 것이 마땅하다 봅니다.”

매장소의 말대로였다. 그들이 히든카드랍시고 내보인 것은 너무나 뻔한, 정설 같은 이야기였다. 마땅히 방법이 없다는 점에는 일정 부분 동의했지만 장자즉위제는 태자밀건법이 시행된 이후로는 아예 폐지 된 제도였다. 천자는 하늘이 내리는 것, 마땅히 본이 될 수 있는 현자가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주장 이래 한 번도 부활한 적 없는 제도이기도 했다. 경염은 이번에야말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장자즉위제를 다시 시행하여, 순차적으로 예왕 전하가 황위를 받드는 것이….”

이쯤해서 나서는 것이 좋겠지. 책상 위를 조용히 두드리고 있던 정왕의 손가락이 멈췄다.

“나는, 장자즉위제에 반대하오.”

경염의 발언과 동시에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까 와는 천차만별인 반응이다. 상관없이, 경염은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대다수의 표정은 하나같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예왕의 표정이 아주 볼 만 했다. 정면으로 부딪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분명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나 또한 형님과 같은 속셈이라고 말입니다.

“태자밀건법 이후 폐지 된 법이 아니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는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것이오. 설마, 그대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자는 뜻이오?”

그랬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 천지였다. 그러나 순순히 그렇다고 답할 멍청한 이들 역시 하나 없는 자리이기도 했다. 경염은 예상했던 침묵에 마저 말을 이었다.



“교지의 행방을 찾은 것 같소.”



이번에야말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조용했던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교지의 행방을 찾았다고? 도대체 어떻게? 정왕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회의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다들 입이 간지러워 죽을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어제 막 예왕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을 내린 후였다. 그런데 일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럼 교지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정왕부에서 찾으러 가고 있소.”
“…!….”

개중 몇 명은 눈에 띠게 놀랐다.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놀람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경염 또한 마음이 아주 편하지만은 않았다. 방금 한 말은 거짓말이다. 경염이 교지의 행방을 알 턱이 없었다. 그저 매장소가 시킨 대로 할뿐이었다.

“찾는 즉시 공개하도록 하겠소. 그렇다면 장자즉위제를 부활시킬 이유도 없겠지.”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회의 시간이 촉박해 자리를 물리고 나왔다. 어찌됐든 제가 주사위를 던진 꼴이 되었다. 이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책임은 매장소가 아닌 저의 몫이었다. 그를 믿지 않았더라면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입니까. 정왕 전하.”

보다 못한 하강이 나섰다. 경염과 그의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 말만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실물의 교지를 갖고 오시지요. 만약 그렇지 못하신다면 장자즉위제는 부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견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 나라의 중대사를 책임지고 있다는 자들이 이리도 행동이 가벼워서야…. 속이 탄 경염은 생수로 목을 한 모금 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시오. 허나.”



“교지 안에 내 이름이 적혀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소?”



도발. 이는 명백한 도발이다. 하강의 눈 안에 크게 지진이 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것이냐, 정왕. 교지의 행방을 찾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교지는 이미 반약이 불태워 세상에 없을 터였다. 무슨 패를 쥐고 있기에 이리도 배짱을 부리는지 모를 일이다.


하강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가능성이 판을 쳤다. 그 역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눈앞의 애송이는 무슨 수가 있는 마냥 여유롭기 그지없다. 하강은 매장소를 떠올렸다. 랑야관을 수중에 둔 곤족 출신의 사내. 아직도 그가 정왕의 뒤를 봐주고 있단 말인가?


그러던 중 회의가 끝났다. 모두들 각자 생각이 깊은 표정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경염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빠르게 사라지는 하강을 바라보며 저 역시도 행동에 나서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는 일부러 예왕의 앞에서 걸었다.

“정왕!”

‘분명 예왕 쪽에서 먼저 접촉해 올 것입니다.’ 매장소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경염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틀었다. 허연 얼굴에 홍조가 뜬 것을 보아하니 제법 멀리서부터 쫓아온 모양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예왕의 고갯짓에 경염은 설핏 웃었다. 걱정 않으셔도 될 텐데 말입니다.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곳으로 걸어온 것이니까요.

“무슨 소리냐. 정말로 교지를 찾았단 말이냐?”
“그럼 제가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짓수를 던지겠습니까.”

침착한 경염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무슨 일에도 반응이 없는 재미없는 얼굴. 예왕은 이맛살을 찌푸리곤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교지를 발견해서 네가 먼저 손을 써둘 참은 아니겠지. 표정에서 하고픈 말이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그 짧은 새에 매장소의 능력이 제게도 옮은 듯 하다.

“교지는 털 끝 하나 건드릴 마음이 없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야 당연히 그럴 테지만.”
“도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까 제 말이 혹시 형님의 기분을 언짢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니, 그래. 나도 안다.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쯤은….”

상대가 누구인가. 정왕이다. 소 경염. 공산당 측에서 아무리 꼬리를 잡으려고 기를 써도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던, 청렴결백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제 아우이지만 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부러질 줄로만 알았다. 곧으면 곧을수록 부러지기 쉬운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

“교지는…. 교지는 어디서 발견했느냐? 범인은 또 누구고.”
“아직 확실하지 않아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어허, 너와 나는 이 일에 가장 관련이 깊은 자들이 아니더냐. 교지는 부황의 뜻이기도 한데 어찌 나에게도 입을 다무는 것이냐.”
“……제 생각으로는.”

경염이 뜸을 들일수록 예왕의 속은 바짝바짝 탔다. 빨리 속 시원히 말하면 좋으련만 왜 이리도 시간을 끄는 지 모를 일이다. 지나치게 신중하던 평소의 정왕을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생각이 들면서도 어쨌건 간에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고 싫은 게 인지상정. 예왕은 참지 못하고 정왕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하강이, 교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뭐라? 예왕의 눈이 휘둥그레 해 졌다.

“교지가 사라졌다고 추정되던 날, 전력이 끊겨 CCTV 녹화가 되질 않았지요. 5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간에 누가 현경사의 엄중한 경비를 뚫고 교지만 훔쳐갈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현경사의 내부 소행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습니다. 허나, 알리바이는 확실하고 물적 증거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지요. 그래서 전 이리 생각했지요.”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예까지 들리는 듯 하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제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도리어 힘이 실리는 예왕의 반응을 살피며 경염이 마저 입을 열었다.



“혹시, 처음부터 목반 안에는 교지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직격타였다. 예왕의 눈빛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하지만, 담당자는 하동이었고 또….”
“그녀가 누구의 제자입니까. 하강입니다.”
“……….”
“현경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강뿐입니다. 이를 토대로 뒤를 캐봤더니…역시, 추측이 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경염의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강이 범인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였다. 그렇다면 그가 왜 교지를 숨겼단 말인가. 그는 분명 제 편인 양 굴었다. 교지만 있다면 이런 귀찮은 일들을 제치고 당장 제가 황위에 올랐을 것이다.


만에 하나 교지에 제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더라도…. 하강의 행동은 의심스럽기에 충분했다. 그는 교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굴지 않았는가. 교지는 한 번 뜯으면 다시 봉할 수 없다고 말한 것도 바로 하강이었다. 차라리 아주 없애버렸다면 납득을 하겠지만 정왕이 찾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그가 여태도 교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왜?



물음표는 머리를 숙주 삼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둘러싼 음해와 모략이 아닌가? 하강이 만약 정왕과 손을 잡았다면 일부러 접근해 내 편인 척 해 놓고선 한 번에 판을 뒤집으려는….


아니, 정왕은 그런 성정이 되질 못한다. 그런 무리에 동조할 사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매장소가 있지 않았는가. 자신조차 깜박 속을 뻔 했던 그 매장소가 말이다. 정녕 매장소와 정왕이 돌아서긴 한 것인가? 보고를 해 올린 건 반약이다. 반약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매장소의 능력을 생각해 본다면…….



도저히 결론이 나질 않았다. 예왕은 혼돈에 휩싸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염은 아주 잠시, 그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잔잔한 파동이 나중에는 해일이 되는 법이지요. 예왕은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야 어찌 되든, 저는 부황의 뜻에 거스를 생각은 없습니다. 형님.”

“……….”
“해야 할 일을 뿐입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가 봐라.”

역시 그의 말대로였다. 경염은 인사를 올리고 바로 돌아섰다. 그가 일러준 대로 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셈이다. 즉위식은 앞으로 7일. 7일 안에 대륙의 다음 태양이 결정된다. 그때, 타이밍 좋게 전화벨이 울렸다.





“……….”

묵묵히 상대의 말을 듣고만 있던 경염이 한 말이라곤 ‘그리로 가겠다’는 것이 전부였다. 길지 않은 통화를 끝으로 경염은 발길을 돌렸다. 즉위식과는 별개로, 저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전화의 발신인은 린신. 내용의 스케일에 비해 전달은 간결했다.






'기왕의 사가에 불을 지핀 범인을 잡았습니다.’









황야방은 총 18편에서 완결되며, 소장본에서는 전문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소장본 발매로 인하여 4월 23일을 기점으로 뒷 이야기는 비공개로 전환됩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결말은 해피엔딩이며, 고어 및 취향 타는 소재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또한 소장본에는 완결 후 미공개 외전이 수록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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