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에 열린 호가필모른 배포전 '호우주의보' 에서 나눠드렸던 무료 배포본입니다.

-약간의 수정을 거쳐, 웹상 무료 공개합니다.

-랑야방x위장자 크로스오버로 원작을 모르시는 분들께선 이해가 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송이는 당신에게.



















명대의 죽음은 예정된 수순처럼 절차를 밟아나갔다.


암호로 점철 된 전보를 통해서였다. 도망은 결국 탈출이 되지 못했다. 어떻게 쫓아갔는지, 또 누구에게 죽임을 당한 건지조차 알지 못했다. 발견 된 건 사체뿐이었고 죽은 자는 언제나 그렇듯 말이 없었다.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남은 것은 탄식뿐이었다.

아성은 탄식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모르지 않았다. 누구나 죽음과 가까운 시대였다. 간혹 위대한 운명을 짊어진 개인이 시대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하지만 대개는 큰 줄기에 편승하기 마련이었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말할 것도 없다. 서로의 목을 베기 위한 투쟁으로 얻을 수 있는 필연적인 결론은 승리와 패배가 아닌 상처 입은 자들이었다. 누구나 다치고,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죽는다. 죽을 수 있다. 아성은 긴 탄식 끝에 결론을 내렸다.

탄식 같은 사랑이었다.




나의 작은 도련님. 언제였더라. 햇살을 등에 이고 제게로 달려오던 작은 몸을 기억한다. 햇살이 닿는 곳보다 낮은 몸은 응당 져야 할 그림자보다도 작았다. 달려오는 내내 뒤죽박죽 섞이는 표정이 빠짐없이 보였다. 숨이 차면서도 멈추지 않으려고 이를 악 문다. 울긋불긋 솟은 입꼬리가 비죽비죽 흔들린다. 웃고 싶은데 숨이 찬다. 그런 와중에도 소리쳐 제 이름을 외친다.


아성 형!


그 순간 세상은 탁 하고 트인다. 두 팔이 절로 벌어져 작은 몸을 끌어안는다. 태양을 온통 품은 것처럼 벅찬 온기에 숨을 멈춘다. 녹아내린다. 그 순간은 멈춘 듯, 그러나 살아있다. 입안에 채 다하지 못한 말이 맺힌다. 나의, 작은.

끌어안은 채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사랑의 고백을 삼킨다. 목구멍에 걸려 도저히 나오지 않았던 한 마디를. 말한다. 나의, 작은, 도련님. 고백컨대 너는 나의 전부였노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시 만나자며 헤어지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토록 작았던 네가 이토록 큰 그림자로 나를 덮칠 때까지. 시대에 휘말려 하나의 희생양이 된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했노라.

탄식 같이 빠져나가던 숨 한 줄기마저도 너였다고.




명대의 죽음은 예정된 수순처럼 절차를 밟아나갔다.


남은 자들이 죽음을 인정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 없다. 그럴 수 있는 자들과 결코 그러지 못할 자들만이 남을 테니까. 이야말로 필연적인 결론이었다. 아성은 어느 쪽이었을까. 역시 중요하지 않다. 명대는 죽었다. 죽음이 가르는 건 선명하다 못해 뚜렷한 생生과 사死였다. 다신 만나지 못할 시간을 가운데 두고 홀로시대를 헤엄쳐 나간다.

이젠 그 끝에 네가 없다.


죽음을 인정한 아성은 돌연 모든 것을 그만 두었다. 명루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아직도 시대는 그를 원했고,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상기시켰지만 아성은 돌아섰다. 실오라기처럼 붙잡고 있던 희망을 연처럼 날려 보내고, 손에 쥐고 있던 타래마저 놓았다. 바닥으로 나뒹구는 타래와 이어진 연이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성은 갔다. 파리로.

명대가 가고 싶다고 했던, 그의 몇 안 되는 계획 중 하나였던 타국 행이었다. 물론 그의 계획대로라면 옆자리에는 명대가 있거나 아님 도착한 그곳에 명대가 피켓을 들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함께 떠나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만 했던 아성의 계획은 무산 되었다. 그는 혼자 떠났고, 그곳엔 아무도 기다리는 이가 없었다.

호텔로 들어가 가방 하나가 전부인 짐을 침대 위로 던져버리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낯선 풍경은 명대가 보고 싶어 했던 풍경.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날씨는 명대가 쬐어야 했던 햇살. 낮게 부는 바람은 아직 작은 도련님의 정수리도 스치고 남을 만큼 사분하기만 한데.

이 모든 것이 명대를 위한 것들뿐인데.


창문을 연 채로 풍경을 바라보던 아성은 문득 말하지 못했던 사랑을 떠올렸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미뤄뒀던 고백의 시구詩句들을 생각한다. 조막만하고 색이 옅은 말들을 하나하나 나열해 본다. 하나같이 달큰한 말들이 찻잔 안에 떨어뜨린 각설탕처럼 녹아갔다. 한적한 오후에는 차 한 잔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너에게 주려했던, 아껴뒀던.


탄식 같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여태 식지 않아 김처럼 피어오른다.

아성은 창문을 닫았다.





파리에서도 한적한 교외를 선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문득 아침에 눈을 뜬 아성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침대를 벗어났다. 셔츠를 갈아입고 코트를 걸쳤다. 타이를 내려두고 커프스를 잠갔다.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와중에도 정작 어디로 가는지는 아성조차도 몰랐다.

그저 걸었다. 처음 보는 풍경임에도 하나같이 명대가 있었다. 아성 형! 외침이 메아리처럼 돌아왔다가 또 저 멀리로 뛰어간다. 제게로 오던 걸음이 멀리로 멀어진다. 더는 작지 않은 몸이다. 마지막 보았던 녹색 니트 차림으로 어서 쫓아오라며 손짓을 한다.

그럼에도 나의, 작은.

아성은 그를 따라갔다. 곧 사라져버릴 환상이란 걸 알았지만 어차피 그에게는 목적지도, 나침반도, 지도조차 없었다. 발길이 닿는 곳이 행선지였다. 사람들은 점점 사라지고, 낯선 풍경들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제가 아닌 반대 방향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명대의 뒤를 쫓았다.

환상이라는 것을 안다. 환각이라는 것도.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원히 깨지 않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벽이 아닌 바닥에 자란 넝쿨들이 잡초만큼 몸을 키워 앞을 가로막았다. 숱하게 놓인 덫처럼 아성의 발목을 잡았다. 허벅지 넘게 자란 갈대 혹은 그와 비슷한 식물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간다. 명대의 모습은 이제 희미해졌다. 점점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성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목적지이고 행선지이다. 맞이해 줄 사람 하나 없을 지라도


그리하여 아성은 도착했다.

아무도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으리라 여겼던 도착지에서.



“……명대?”



그를 꼭 닮은, 그의 사랑을.

탄식 같은 그리움을.






◈ ◈ ◈







아성은 기묘한 식탁에 앉아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를. 오래 된 고성古城같은 저택은 애당초 사람이 산다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행색을 하고 있었다. 어느 샌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역사의 유물 중 하나라고 한다면 차라리 납득할 수 있을 만한 모습으로. 이끼로 뒤덮인 외벽이며, 칭칭 자란 담쟁이 넝쿨이 고딕 양식의 뾰족한 첨탑까지 모조리 장악한 뒤 시위를 펼치는 중이었다.

홀린 듯 정문을 통과한 아성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한여름에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장미 정원이었다. 탐스럽게 열린 꽃잎은 붉지도 않고 희었다. 온통 백색 꽃잎들이 타는 듯 강렬한 여름을 흉내 내며 저마다 가시 위에 수줍게 몸을 연 채였다.

장관 아닌 장관 앞에 넋을 놓고 있기도 잠시. 누군가 장미 덤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머리와 흰 셔츠. 갈색 바지와 새 것도, 낡은 것도 아닌 구두. 아성은 남자를 발견했고 곧 해야 할 말을 포함한 모든 단어를 잃어버렸다. 그는 한 순간에 언어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획 하나 선뜻 긋지 못했다. 서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명대가.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예.”



물론 명대일 리는 없었다. 그는 이미 죽었다. 아성의 반대편. 긴 식탁의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남자는 명대와 몹시 닮은, 그러나 명대는 아닌. 신원을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나? 창백한 흰 뺨과 진작 색을 잃어버린 입술은 최소한으로 달싹거렸다. 숨은 쉬는지 모를 만큼 고요한 콧대는 한 번도 큼지막하게 들썩거리는 법이 없었다. 단정한 머리카락과 그만큼 단아한 손길은 앞에 놓인 고깃덩이를 슥슥 썰어내는 손짓만큼 과감하고, 동시에 잔잔했다.

명대가 아니다. 아성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명대일 수가, 없다. 그는 나이프를 저런 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

“당신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 진 모르겠지만.”



명대를 닮은 남자는 손길만큼이나 고요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토록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보지 말라는 경고는 아무 짝에도 소용없었다. 아성은 그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남자는 보일 듯 말 듯한 한숨을 공기 중에 살포시 내쉬었다.

왜일까. 아성은 문득 그의 눈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쳐다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신기해서요.”

“뭐가 말입니까.”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아성은 나이프를 쥔 채로 정면을 바라봤다. 여전히 상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좋아하던 사람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이제, 들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지만요.”


명대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봤다. 놀란 눈동자마저 감추진 못하겠는지 동공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한 말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었다. 아성은 남자를 바라봤다.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

“어차피 인간이란 누구나 다 죽고 사는 것을요.”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과연 가슴이, 이전에 머리가 그 사실을 받아 들였는 진 의문이다. 물론 알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고, 산다. 다만 그 대상이 명대인지 아닌지가 아성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척도가 될 뿐이다. 아성은 모르겠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어디까지나 남은 자로서, 또 어디까지 받아들였는지.



“죽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이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합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멈췄던 나이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요는 순간일 뿐이었다. 균열이 갈 뻔 했던 얼굴에도 곧 평화가 도래했다. 그 모든 과정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던 아성은 직감적으로 남자가 전쟁을 알고 있는 자라는 것과, 지금 그들 사이에서는 탐색전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상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왜 이 오래 된 저택 안으로 들일 생각을 했는지가 오직 의문이었다.



“당신도 내 친우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란 건.



“물론 죽은.”


필연적으로 상처 입은 자들을 남길 뿐이다. 아성은 말없이 남자를 바라봤다.






기묘한 식탁 다음에는 역시 기묘한 티타임이 이어졌다. 이 음식들과 차는 누가 내오는 걸까 싶을 정도로 조용한 저택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건 남자뿐이었다. 물론 가끔 저도 움직인다. 아성은 정물처럼 앉아 등받이에도 기대지 않고 꼿꼿한 허리를 세웠다. 반듯한 자세는 습관이었다. 아성은 오히려 편하게 앉는 일을 더 어려워 했다. 잠을 잘 때를 제외하곤 누워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아성을 두고 명대는 역시 아성 형은 재미가 없다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그때마다 아성은 한 번 더 혀를 차면 혓바닥을 뽑아도 된다는 뜻으로 간주하겠노라고 답했다.



“제가 죽은 친구 분과 닮았다고 하셨죠.”


명대는 혀를 차는 대신 앞으로 쑥 내밀며 도망치곤 했다.


“공교롭게도 당신은 제가 좋아하던 사람과 똑같이 생겼고요.”



이제는 돌이킬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기억들이다. 아성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입술을 적신 건 명백한 밀크 티다. 달진 않았다. 다만 생전 명대가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명대의 밀크 티는 아성이 입도 못 댈 만큼 달았다.

아성이 남자를 바라봤다.



“우연일까요?”


이 모든 것들이.


“…아니면.”


아니라면, 달리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하는지.


“환상일까요.”



아성이 내린 결론은 퍽 낭만적이었다. 도저히 그런 결론이 아니고서야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 하겠다는 듯이. 일단은 해가 진 이 시각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저택에 앉아 저녁식사까지 마친 뒤, 죽은 명대와 똑같이 생긴 남자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것부터가 기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꿈인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벌써 여러 차례 들었던 생각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겠군요.”


남자는 말했다.


“믿기지 않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믿고 싶은.”


묘하게 말을 흐리는 남자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성은 다시 티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달지 않았다. 만약 지금 이 모든 것들이 환상이라면 아성에게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사실 그는 아까 전부터 남자와 명대의 차이점에 대해서 빼곡하게 찾아내려가는 중이었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얼굴과 목소리 뿐. 그 외에 모든 것들이 달랐다.

환상이 아니다. 생각하면서도 아성은 보다 확실한 증거를 원했다.


“이름이 뭡니까?”


직선적인 질문이었다. 아성은 환상에 빠진 자들의 말로를 잘 알고 있었다. 부귀영화에 목을 매든, 아니면 단순히 전쟁에 미친 미치광이든 뭔가에 집착하기 시작한 자들의 마무리는 항상 좋지 못했다. 자신이 그렇게 될까 두려웠다. 정확히는 명대를 향한 마음이 어떤 다른 이름으로 훼손될까 무서웠다. 착각할까 겁이 났다. 눈앞의 남자는 명대와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명대는 아니다.


“매장소, 입니다.”


절대로.








아성이 기묘한 저택에 머무른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정확한 시간은 아니다. 그래도 해는 뜬다는 말처럼,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을 보며 대강 그 즈음쯤 됐으리라 예상할 뿐이다. 저택 안에는 달력도, 시계도 없었다. 전화기도 없었다. 전화기는 차라리 없어서 다행이었다. 파리로 오기 전, 아성은 문득 수화기를 들었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내려놓는 적이 종종 있었다. 목적 없는 착란錯亂.

미쳐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증세였다. 가슴은 물론 머리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아성은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으면서 매번 빠짐없이 탄식 했다. 그는 명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더는 어디로 전화를 걸어야 할지, 번호를 몰랐다.



“친구 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아성은 매장소에 관해 물었다. 정확히는 그가 갖고 있을 사연에 대하여. 그들의 대화는 대개 그들이 사랑했던 무언가에 대한 향수로 시작해, 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끝나곤 했다. 그동안 아성의 시선은 테라스 밑으로 펼쳐져 있는 장미 정원에 꼬박 닿아 떨어질 줄을 몰랐다. 흰 장미의 탐스러움은 볼 때마다 계절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아직 여름, 명대가 살아있던 계절인 것처럼.



“…청아한 뜻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무척 강직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매장소는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말을 이어 받았다.


“막상 그에 대해 말하라고 하니 어렵군요. 분명 더 할 수 있는 말이 있었을 텐데.”


할 수 있는 말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에 더 가까울 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의 차례였다.


“……모든 걸 기억하기엔 세월이 너무 오래 지나버렸습니다.”



매장소는 멋쩍게 웃었다. 그가 일주일 간 거의 청자聽者`만을 자처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눈앞에 선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역사책이 아니고서야 찾아볼 수 없는 기억이었다.

사진 같은 건 물론 남아있을 리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기억 뿐. 오직 그것뿐이라 애타게 쥐고 있던 기억이다.

이제는 다 잊어버렸다고 해도 누구 하나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을 세월이었다. 알고 지내던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죽지 못한 건 자신뿐이다. 그래서 기억하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도. 모두 매장소의 몫이었다. 남은 자는 모두의 죽음을 받아들이되 자신의 죽음만은 맞이하지 못했다. 왜일까. 그는 죽음에서조차 범인凡人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을까.



“친구 분의 이름은 뭡니까?”

“…….”

“그마저도 잊어버리셨습니까?”


매장소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잊어버렸느냐는 그 질문은 스스로에겐 역설적이었다. 사실은.


“…옌.”


정말은.


“소경염… 입니다.”


하나도 잊지 못했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었다. 매장소는 말을 멈추고 아성을 바라봤다. 잊지 못한 눈빛이 거기 있었다. 아니라는 것을 안다. 눈앞의 남자는 그가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환생이라 할지라도 이미 생을 한 바퀴 돌린 자였으니 과거의 그와 같은 사람일 수 없었다. 얼굴뿐이었다. 목소리가 귀에 익을 뿐. 경염이 아니다.

질문을 던진 사람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그들 사이로 휩쓸고 지나간 바람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성은 한 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매장소의 눈을 고집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순간이었기에. 어쩌면 남은 자들의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상처 받았고, 결국에는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명대.”


알면서도 불러본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하나도 잊을 수 없기에. 아성은 스스로에게 확신하듯 말했다.








그날 밤은 기묘한 저택에서의 일주일 중에서도 가장 기묘했다.

아성은 문득 잠에서 깨어 복도를 걸었다. 목이 마르지도 않았고 혼자 남겨진 밤이 외로워서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성은 불빛 하나 없는 복도를 제 집인 양 걸었다. 호텔방과 그곳에 남겨 둔 짐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세상이 돌아가는 시간과 체감하는 시간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몇 년 동안 살아 온 사람처럼 저택이 익숙했다. 명공관과 비슷한 구석이 있느냐 하면은 그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성은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목적지도, 행선지도 없는 걸음이었다. 어둠은 그 자체로 미로였다. 발길이 닿으면 그곳이 길이었다.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다만 언젠가는 도착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무엇에 닿든 일단 발아래에 땅을 딛고 선 것만은 분명했다.

다 죽어가는 신음을 들은 것은 보다 후의 일이다. 어둠 속에서 그를 끄집어 낸 것은 괴로운 목소리였다. 울음은 아니다. 크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주 조용했다. 그럼에도 당장 끊어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소리는 방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살짝 열린 틈바구니에서는 유일하게 빛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흘러나와 밀물처럼 발밑을 적셨다.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무례한 행동이다. 알면서도 아성은 멈추지 않았다. 촛불 하나가 일렁거리며 비추는 방 안에는 오직 매장소만이 있었다. 아, 신음은 그의 것이었다. 매장소는 스스로를 꽉 부둥켜안은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아성은 한달음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괜찮습니까?”


괜찮지 않았다. 대답을 못할 정도로.


“어디가 아픈 겁…….”

“……세요.”


자신을 붙드는 아성의 손을 움켜 쥔 매장소가 그를 밀어냈다.


“나가……십시오.”



말 한 마디도 겨우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아성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파 보이는 환자를 두고 그냥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더욱이 명대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였다. 불현 듯 습관 같은 걱정이 불쑥 일어섰다. 명대는 어땠더라. 감기 몸살인가? 그렇다면 일단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아성은 급한 대로 이불을 끌어 모아 매장소에게 둘러주었다. 저택은 익숙했지만 명공관만큼은 아니었기에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약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제발…… 나가… 주십시오.”


올려다보는 눈빛이 절박했다. 이전에 익숙했다.


“부탁…… 입니다.”


…아, 명대. 아성은 탄식했다.



어떤 인력이 그를 이끈 지는 차마 설명하지 못 할지라도, 그 순간 떠오른 이름은 알게 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약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자의 명찰이었다. 그것은 자체만으로도 아성을 초조하게 만들었으며, 안절부절하게 만들었고, 끝내 탄식하게 만들었다.

아성은 그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명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그때였다. 아성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매장소가 그를 밀었다. 창백한 피부나 유난히 뼈마디가 도드라지던 손목 등을 떠올려보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의문스러울 정도로 억센 힘이었다. 남자는 아성의 위를 장악한 채 고개를 숙였다. 핏기가 가신 입술로 목덜미를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성은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단언컨대 그의 생애 전반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감각이었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도 같았고 기약 없는 바닥으로 영원히 꺼져 들어가는 것도 같았다. 내일 없는 밤인 것도 같았고, 태양과 달이 동시에 뜬 것도 같았다. 종말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절망적이었고, 동시에 죽은 자인 양 나른해졌다.

아성은 이불을 꽉 쥐었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보인 생에 대한 유일한 집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힘이 풀렸다. 의식은 미끄럼틀을 타고 아래로, 혹은 위로 떨어졌다. 가라앉았다. 잠시 떠올랐다가도, 곧 희미해졌다.


의식은 오는 길 어딘가에 떨어뜨렸다.

명대. 명대의 얼굴을 봤던 것도 같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훤한 대낮이었다. 아성은 정해진 시각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목덜미를 만졌다. 표면에는 툭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상처가 서로 간격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이 두 개가 나란히 박히면 그런 상처가 남을 듯싶다.



“일어났습니까?”



익숙해진 목소리에 고개가 그리로 향했다. 매장소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중에 다행인 점은 아파보였던 어제와 달리 남자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아성은 안도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수긍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전 환자입니다.”


매장소도 숨길 생각은 없었다.


“화한독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증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인간의 피를 원하게 되는 경우가 있죠.”

“…….”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단순히 실례라고 표현하기엔 보통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성은 더는 묻지 않았고 그대로 순순히 사실을 받아들였다. 길을 잃고 들어온 방랑객을 아무 말도, 심지어 서로 동의도 없이 이곳에 머무르게 한 것부터가 상식적인 일이라 보기에 어려웠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처음부터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상식은 현실에서나 의미 있는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르니까요. 매장소의 목소리엔 어쩐지 힘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아성은 대답하지 않았고 다만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이 병은 치료를 할 수도 없고, 치료를 해 줄 이도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더 이상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유독 쓸쓸하게 들렸기 때문일까. 어쩌면 아성은 알 것도 같았다.


“아뇨,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 그는 처음으로 웃으며.



“사실 저는 이곳에 죽으러 온 거니까요.”



말했다. 이곳에 온 이유.






◈ ◈ ◈







실은 기묘한 밤이 하루 더 있다.

그날 밤이야말로 모든 설명할 수 없는 밤중에 가장 기묘했을 거라고, 아성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설명도, 이해도 필요 없는 밤이었다. 납득 역시 현실에나 존재하는 것이라 환상과는 무관했다.


환상의 밤이었다. 퍽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입술을 맞물려야만 했던 명분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기억하는 건 그저 그 순간, 찰나의 감각에 불과했다. 침대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실은 침대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꽃잎처럼 한 꺼풀씩 벗겨지는 옷가지들이 사라지고 나면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작은 봉오리였다. 희었다. 혹은 붉기도 했다. 흰 곳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울혈이 곳곳에 꽃처럼 피었다. 난폭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정하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뜨거웠다. 멈추진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

명대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아성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명대가 아니다. 다짐하듯 되뇌고 나면 눈앞에는 명대의 얼굴이 있었다. 물론 명대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명대는 아니다. 알면서도.

은밀한 틈 사이를 노니는 손가락은 언젠가 명대를 붙잡았던 바로 그 손이었다. 허나 평생 벌린 적 없던 무릎 사이는 경염도 열지 못했던 곳이었다. 둘이 원하고 하나가 허락했다. 정중하진 못할지나 무례하지도 않은 움직임이 허리의 능선을 따라 끊임없이 움직였다. 오로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양.


아성은 처음부터 옛 친구라고 소개하던 매장소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알기에 더는 묻지 않았다. 환상에서는 그런 것들을 묻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제 앞가림을 하기에도 벅찼다. 아성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으러 온 곳이다. 파리에, 아성은 죽으러 왔다.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 한 가운데서 희열하며, 아성은 초기의 목적을 떠올렸다. 죽으러 온 곳이다. 더는 살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계절은 여름에 멈췄고, 그의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시대는 개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살아남은 아성은 기꺼이 죽기로 마음먹었다.


그랬었다. 이젠 일주일인지, 혹은 이주일인지. 알 수 없어져버린 시간들이 흐르기 전까진.


태양도, 달도 뜨지 않던 밤이 지나고 나니 흰 장미가 아침처럼 밝아왔다. 아성은 겨울에도 흐드러진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매장소가 함께였다. 아무도 가자고 하지 않았고 손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모든 건 암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 남자는 그들에게 벌어진 기묘한 일에 대하여 묻지 않았고, 답하지도 않았다. 우연이었을까?

필연이다. 환상은 답하지 않는다. 계절이 멈춘 뒤로는 현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져 버렸다.

정원에는 여전히 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멈춘 계절의 상징이다. 이곳은 아직 여름의 한 복판이라고, 꽃잎들은 나부끼며 속삭인다. 아성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떠올린다. 기꺼이 사랑한 이름.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나의, 작은.

나의, 모든, 여름.






“혹시 말한 적 있었습니까?”


손끝에 꽃잎이 닿았다. 더 아래로 내려간다. 줄기에 닿는다. 가시가 돋아있었다. 손가락이 찔렸다. 피 한 방울이 묻었다. 꽃잎에 닿았다. 과연 장미는 희었고, 곧 붉어졌다.

꺾었다. 아성은 매장소를 바라봤다. 바람도 시간을 따라 멈췄다. 움직이거나 움직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두 사람뿐이었다.




“제 이름은…… 아성입니다.”


아성은 그에게 꽃을 내밀었다. 계절을 건네주었다.




비로소 주변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끄트머리서부터 마모되는 정원은 하얀 모래가 되어 차례대로 부서졌다. 장미꽃은 녹을 새도 없이 부스러졌다. 멈춰있던 세월의 흐름 동안 줄곧 버티다가 이제야 죽는다. 그러나 매장소는, 눈앞의 남자만큼은 사라지지도 부서지지도 않은 채 거기 남았다. 이제야 그 또한 움직이는 시간 속에 동승하게 된 까닭이다.


남자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아성은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떠올렸다.









마지막 한 송이가 남았다.

그것을 당신에게 건네주기 위하여.
















 마지막 한 송이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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